지난 3일(현지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10분가량 이동해 도착한 소도시 에쉬본(Eschborn). 에쉬본 곳곳에서는 한국 기업의 이름과 로고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삼성전자(005930)의 새 사무실이 지어지고 있었고, 500m가량 떨어진 곳에는 LG화학(051910) 테크센터가 오는 5월 문을 열 예정이다.

LG화학은 유럽 지역 대관 조직도 신설할 계획이다. 에쉬본에서 만난 김진석 LG화학 유럽법인장은 “미국에 있는 조직처럼 유럽 지역에 대관 업무를 전담하는 조직을 만드는 방안을 본사 차원에서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이 환경을 앞세워 무역 규제를 쏟아내면서 한국 기업들도 대응에 나섰다. 규제로 인해 비용 부담이 커질 것이란 위기감이 크지만, 친환경·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시장 점유율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EU 집행위원회. /권오은 기자

6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EU는 새로운 성장 전략인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에 따라 경제·산업·에너지 등 주요 정책에 친환경과 기후 목표를 포함시키고 있다. 기존 환경 규제의 적용 대상이 확대되거나 기준이 높아졌고, 새로운 제품군에 대한 신규 규제가 최근에 대거 도입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공급망 실사 지침, 기업의 지속가능성 공시지침(CRSD), 에코디자인 규정, 신(新)배터리 규정 등이 올해 도입·발효될 예정이다.

무역협회는 파급성과 시급성, 대응 난이도를 바탕으로 우리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공급망 실사 지침과 에코디자인 규정이 가장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공급망 실사 지침이 시행되면 기업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환경 훼손과 인권 침해 활동 여부에 대한 실사 의무가 생긴다.

제3국 기업 중 매출액 1억5000만유로를 초과하는 대기업과 고위험 산업군(섬유·가죽, 광물, 농림어업 등) 비중이 50% 이상인 중견기업(매출액 4000만 유로 초과)이 대상이 될 전망이다. 지난해 EU 집행위 안과 EU 이사회 안까지 나왔고, EU 의회의 수정안까지 오는 5월쯤 제출되면 하반기 중으로 최종 법안이 발표될 전망이다.

연내 시행될 전망인 에코디자인 규정 개정안은 2009년 발표한 지침에 제품의 내구성, 재사용가능성, 수리가능성 등 지속가능성 요소가 추가하는 것이 핵심이다. 모든 품목이 적용 대상일 뿐더러 디지털제품여권을 발급해 공급망 및 생애주기를 추적관리하고 그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판매되지 않은 상품을 폐기하는 경우도 폐기 이유를 밝혀야 한다.

대‧중‧소 유럽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비즈니스 유럽(Business Europe)의 루이자 산토스(Luisa Santos) 사무차장은 “올해에만 EU에서 새롭게 도입을 추진하는 규제가 43개나 된다”며 “EU 기업들이 추산하는 바로는 규제 준수를 위한 서류 작성 등 행정 처리를 위해서만 1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전했다.

지난 2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 EU 집행위원회에서 만난 (왼쪽부터) 소냐 가스파지노바 대변인, 아리아나 포데스타 대변인, 미리암 가르시아 페러 대변인. /한국무역협회 제공

EU는 규제가 무역장벽이 아니라 환경 보호와 기술 혁신을 위한 ‘정당한 조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기조가 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난 미리암 가르시아 페러(Miriam Garcia Ferrer) EU 집행위 대변인은 “EU는 무역 시장 개방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며 “환경 규제로 유럽 시장을 폐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자간 협력을 통해 무역을 더 개방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디아나 아콘시아(Diana Acconcia) EU 집행위 기후총국 담당 국장도 정만기 한국무역협회 부회장과의 면담에서 “배출권 거래제 등은 기업의 기술혁신을 저해하는 규제로 보일 수도 있지만 친환경 추진에 소극적인 기업에는 불편함을, 적극적 기업에게는 인센티브를 줘 그린전환 기술혁신을 촉진한다”며 규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한국 기업이 EU 역내 연구·개발(R&D) 조직은 물론 대관 조직을 강화하는 것도 규제가 앞으로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포스코 유럽법인도 EU의 유럽 그린딜 전략에 발맞춰 2019년 브뤼셀 사무소를 다시 열었다. 2003년 문을 닫고 16년 만이었다.

규제에 따른 부담이 크지만 새로운 기회가 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예를 들어 EU는 탈탄소 사회 추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각 회원국에 플라스틱세를 도입할 것을 추진하고 있다. 폐플라스틱 발생량 중 재활용이 불가능한 플라스틱은 ㎏당 0.8유로의 부과금을 납부하는 방식이다. 이미 스페인은 ㎏당 0.45유로의 플라스틱세를 도입했는데, 리사이클링 플라스틱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김진석 LG화학 유럽법인장은 “EU 내에서 리사이클링 제품을 충분히 구할 수 없어서 고객들의 요청이 계속해서 들어온다”며 “앞으로도 유럽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 친환경 제품 판매를 강화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포스코 역시 CBAM 시행으로 탄소배출량이 많은 철강재가 설 자리가 좁아지는 만큼 시장 점유율을 확대할 기회로 보고 있다. 정정민 포스코유럽 브뤼셀사무소장은 “인도·중국 등 탄소배출에 집중하지 않는 나라보다 먼저 CBAM 관련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유럽 현지 제철소를 제외하고 포스코가 제1의 대안이 되어보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