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선배님이 어느 날 ‘계면활성제 없이 물과 기름을 섞는 기술을 발견했다’며 와보라고 하더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속는 셈 치고 찾아갔는데 그 기술에서 가능성을 봤다. 이 기술을 처음으로 제품화한 것이 ‘킵(KYYB)’의 보습 앰플이다.”

노정석 비팩토리 대표는 1996년 국내 최초의 해킹 사건을 일으킨 해커 출신의 연쇄 창업가다. 대학 시절 보안 스타트업 ‘인젠’을 창업해 코스닥에 상장시켰다. 인젠은 이후 경영진 횡령사건이 발생해 2010년 상장폐지됐다.

노 대표는 2005년 블로그 서비스 스타트업 ‘태터앤컴퍼니’를 창업했고 구글에 인수됐다. 구글이 인수한 한국 회사는 이 회사가 유일하다. 연달아 창업한 모바일게임 이용자 분석·마케팅 플랫폼 ‘파이브락스’는 글로벌 모바일 광고 전문 기업 탭조이가 인수했고, 노 대표는 VR(가상현실)과 AI(인공지능) 패션 스타일링에 잇따라 뛰어들었다.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과를 졸업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줄곧 IT(정보기술)·보안 분야에 몸담아온 그는 최근 일곱 번째 도전으로 ‘미래 화장품’을 택했다. 그는 ‘혁신 원료’와 ‘AI 기반의 맞춤형 제조’가 비팩토리의 성장 동력이라고 말했다. 노 대표의 비전에 공감한 국내 대표 화장품업체 코스맥스(192820)가 손을 내밀었다. 코스맥스는 비팩토리에 초기투자금과 화장품 원료를 제공했고 노 대표는 코스맥스의 디지털 전환을 돕고 있다. 그를 이달 초 서울 성동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노정석 비팩토리 대표. /비팩토리 제공

-업계 이력이 두텁다. 그간의 경험을 소개해달라.

“첫 창업은 보안 분야였다. 1996년 창업했는데 2002년 IPO(기업공개)를 해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곧장 미국으로 가 보안 사업을 했는데 당시 IT 거품이 꺼지던 시절이어서 빛의 속도로 망했다. 세 번째 회사가 2005년에 창업한 태터앤컴퍼니다. 블로그 서비스 회사였고 2008년에 구글에 인수됐다. 구글에 들어가 2년 동안 일했는데 그곳에서 선진문물을 잔뜩 봤다.

인수 논의 당시 카운터파트너였던 분이 ‘구글에는 10년 앞선 엔지니어링 인프라가 있고, 10년을 앞선 철학이 있으니 와서 공부하자’고 설득했는데 정말이었다. 회사 내부의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있어 배우고자 마음만 먹으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었다. 내 프로젝트와 무관한 회의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2010년에 구글에서 나왔는데 이후의 12년은 구글에 대한 오마주라고 말할 정도로 그때의 교훈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구글에서 무얼 배웠나.

“기술과 혁신에 대한 믿음을 배웠다. 그때 구글은 이미 머신러닝을 쓰고 있었다. 일화를 소개하자면 당시 국내 포털사이트 검색량 점유율이 네이버(NAVER(035420)) 70%, 구글 25%였다. 그래서 모든 프로젝트가 어떻게 하면 네이버를 이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네이버처럼 예쁘게 정돈된 검색 화면’을 답으로 제시했고 이를 위해 비정규직 인력을 더 뽑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경영자였던 에릭 슈미트로부터 돌아온 답은 ‘사람은 못 뽑아준다. 대신 기계를 사달라고 하면 몇천 대라도 사주겠다’는 말이었다. 머신러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본 것이다.

결국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적용된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유튜브가 뜨니까 자연스럽게 검색 환경이 구글 위주로 바뀌게 됐다. 세상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고 완전히 다른 무기를 가지고 와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한국에 돌아온 후엔 어떤 일을 했나.

“파이브락스 창업 등 여러 사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사업 아이템을 정하는 원칙을 세 가지를 세웠다. 첫째는 한국적 강점이 있으면서도 글로벌 사업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내 전공인 IT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인간의 본성과 맞닿아 있어서 끊임없이 구매해야만 하는 영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패션, 라이프스타일, 교육, 음악·콘텐츠, 뷰티로 추려졌다. 고려 끝에 패션 사업을 했는데 시원하게 망했다.”

-그 다음 도전한 것이 화장품인가.

“그렇다. 기계로 만들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쉬운 것이 화장품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몇 가지 원료를 섞으면 되는 제품군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품을 만드는 기계를 만들었고, AI 기반의 추천 엔진을 개발해 나만의 화장품을 만드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스위즐’이라는 브랜드를 내고 스킨케어 맞춤 제조 서비스를 시장에 런칭한 건 지난해 7월이다.”

비팩토리가 운영하고 있는 킵(KYYB)의 '5나노차저'(왼쪽)와 '5나노앰플'. '모아시스' 기술을 적용해 히알루론산 입자를 5나노미터 크기로 쪼개 피부에 침투할 수 있게 했다. /비팩토리 제공

-스위즐과 더불어 앰플 브랜드 ‘킵(KYYB)’도 운영 중이다. 물과 기름을 섞는 기술을 적용했다고.

“’모아시스’라는 미래기술이다. 카이스트 선배인 김철환 스카이테라퓨틱스 대표가 발견했다. 기름의 분자를 작게 쪼개 계면활성제 없이도 물과 섞이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분자 크기만 줄인 것이 아니라 분자의 성분이 그대로 유지되게 한 것이 특징이다.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다’는 관념을 뒤집은 발견이다 보니 눈으로 보기 전까진 나도 믿지 않았다. 과학계에서도 처음 4년 간은 믿지 않았다. 그런데 김철환 박사가 꾸준히 논문도 쓰고 기술력을 증명한 끝에 1년 만에 안약 임상시험 2상 허가를 받았고 내년에 3상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 기술을 처음으로 제품화한 것이 ‘킵’의 히알루론산 앰플 ‘5나노차저’와 ‘5나노앰플’이다.

-어떤 특징이 있나. 기존 제품들과는 무엇이 다른가.

“기름의 분자를 쪼갠 모아시스 기술로 히알루론산의 분자를 쪼개 피부 침투가 용이하게 했다. 히알루론산은 피부 안에서 수분을 붙잡고 있는 물질이다. 시장에서 인지도도 높고 화장품 원료로 많이 쓰이는데 분자 크기가 커서 피부를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장 쓸모없는 물질이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히알루론산이 많이 함유된 제품은 질감이 굉장히 끈적끈적하다. 분자들이 피부에 스며들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실타래처럼 엉켜서 그렇다. 우리는 이를 5나노미터(㎚, 1㎚는 10억분의 1m)로 만들어 피부 속으로 침투할 수 있게 만들면서도 고유의 성질은 잃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끈적임 없이 산뜻하게 흡수된다. 피부 겉면만이 아니라 속건조를 해결할 수 있는 제품이다.”

-모아시스는 어떤 제품에 또 적용할 수 있나.

“여러 가지 용도로 쓸 수 있는 워터와 핸드크림을 출시하려 한다. 사실 보습크림, 마스크팩 등 더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달라는 소비자 요구가 많다. 그런데 이미 앰플만으로도 팩이나 크림이 필요 없을 만큼 피부 속까지 보습이 되기 때문에 제품군을 이 이상으로 늘리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세상에 있는 제품을 우리까지 똑같이 다시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 킵의 원칙이다.

올 3월에는 지방분해 크림을 선보이려 한다. 피부과에서 시술하는 지방분해 주사액과 같은 성분의 크림을 만들 예정이다. 히알루론산 앰플과 같은 원리다.”

-비팩토리가 마지막 창업인가.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사실상 마지막 회사다. 이번에는 절대 팔지 않을 것이다. 이 영역이 할 일이 많다. 투자 유치 계획도 없다. 회사 매출만 가지고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올해 말에는 흑자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오랫동안 꾸준히 해보려 한다.

사업적으로는 스킨케어 맞춤 제조 서비스인 ‘스위즐’을 킵의 한 요소로 가지고 가려 한다. 스위즐이 제공하는 맞춤 제조 서비스는 선택지가 너무 많다보니 오히려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을 때도 있었다. 킵에 이 서비스를 적용할 때는 가이드를 좀더 추가하려 한다. 이를 위해 스위즐은 잠시 재정비 시간을 가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