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타트업 투자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로컬(지역) 기업의 소외는 심화하고 있다. 지난해 신규 벤처투자금 약 7조원 가운데 80%가 수도권에 집중됐다. 2000개 이상의 스타트업 회원사를 두고 있는 코리아스타트업포럼에 따르면, 스타트업 10곳 중 8곳은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 있다. 스타트업이 청년 일자리 창출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만큼 로컬 스타트업을 지원·육성하는 것은 곧 지역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해외 스타트업 강국의 지역 스타트업 생태계를 살펴보고, 부산·제주·대전·강원의 현실은 어떤지 비교해 짚어본다.
이스라엘 UAM 스타트업 어반에어로노틱스 사무실 전경. /김우영 기자

지난 8일 이스라엘의 경제수도 텔아비브(이스라엘 헌법상 수도는 예루살렘) 중심가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중부 도시 야브네(Yavne).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스타트업 ‘어반에어로노틱스’의 330㎡(100평) 크기 연구실에 들어서니 자체 개발한 자동차 크기의 UAM ‘시티 호크’ 시제품 3대가 눈에 띄었다.

시티 호크는 다른 UAM 모델과 달리 주회전날개(로터) 2개가 앞뒤로 기체 내부에 장착돼 있는 게 특징이다. 로터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덕분에 도심 속에서 안전한 비행이 가능하고 다른 모델 대비 60%가량 소음이 적다. 작년 7월 프로토타입(시제품)이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어반에어로노틱스는 오는 2029년까지 수소연료전지를 장착한 시티 호크를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어반에어로노틱스의 오퍼 시프리스 최고기술책임자(CTO). /이신태 PD

어반에어로노틱스의 오퍼 시프리스(Ofer Shifris)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이스라엘의 테크 기업들이 몰려있는 텔아비브 밖에 회사를 차린 것은 단점보다 장점이 많아서라고 설명했다. “UAM처럼 부피가 큰 제품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은 넓고 여유로운 공간이 필요합니다. (임대료가 비싼) 텔아비브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죠. 인재 영입 경쟁도 덜해 지역 내 유능한 엔지니어를 구하기도 쉽습니다. 연구 직원 25명 중 24명이 주변 지역 출신들입니다.”

이노비즈의 공동창립자인 오렌 부스키라 최고연구책임자(CRO). /이신태 PD

지난해 14억달러(약 1조95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으며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 라이다(LiDAR) 스타트업 이노비즈는 ‘로쉬 하인(Rosh Haayin)’이라는 텔아비브 외곽 도시에 거점을 두고 있다. 라이다는 레이저를 발사해 반사된 신호로 주변을 인식하고, 이를 3차원(3D) 이미지로 구현하는 기술이다. 자율주행차의 핵심 부품 중 하나로 꼽힌다. 라이다를 생산하고, 이를 적용한 자동차의 시험 주행을 위해선 교통 체증 없는 주변 도로가 필수다.

이노비즈는 이스라엘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6번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덕분에 언제든 시험 주행을 통해 데이터를 쌓을 수 있다. 이노비즈 공동 창립자인 오렌 부스키라(Oren Buskila) 최고연구책임자(CRO)는 “로쉬하인에 온 것은 우리의 선택이었다”며 “제품 생산과 시험 주행이 필요하기 때문에 텔아비브에 회사를 차렸다면 제약이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노비즈의 라이다로 구현된 3차원 이미지 모습. /김우영 기자

이스라엘, 텔아비브 밖에 자리 잡은 로컬 스타트업들은 혁신을 위한 거대한 실험장 같은 모습이었다. 인근 도시 대비 60% 이상 비싼 텔아비브의 임대료와 극심한 교통 체증에서 벗어나 전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선도 기술 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도 로컬이 자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우리나라 경상도 만한 땅덩어리의 소국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스타트업 대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전체 테크 기업의 절반 가까이가 지방 도시를 무대로 하고 있다. 2020년 기준 테크 기업 4705곳 가운데 2092곳(44.5%)이 베르셰바, 하이파, 페타티크바 등 지방 도시에 있다.

그래픽=이은현

벤처캐피탈 TAU벤처스의 최고경영자(CEO)인 님로드 코헨(Nimrod Cohen)은 “정부가 지방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기업 또는 투자자에게 세금 감면의 혜택을 제공해주거나 투자금 일부를 지원해주고 있다”며 “덕분에 이스라엘 각 도시마다 스타트업 생태계를 갖출 수 있게 됐고 많은 테크 기업들도 찾아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에선 ‘이스라엘혁신청(Israel Innovation Authority)’이라는 정부 기구가 스타트업들에 대한 지원을 총괄한다. 예루살렘에서 만난 이스라엘혁신청의 아비브 지비(Aviv Zeevi) 부사장은 “정부가 스타트업에 자금을 투자하는 벤처캐피탈(VC)의 역할도 한다”며 “통신, 전기, 건축, 의료, 환경 등 220개 분야의 전문가 수백명이 선별한 스타트업에 투자를 집행하는데, 민간 기업이 투자를 꺼리는 기술완성도(TRL)가 낮은 스타트업이 주요 투자 대상”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혁신청에 따르면 지난해 스타트업들에 지급된 보조금의 규모만 293억세켈(약 11조8500억원)에 달한다.

아비브 지비 이스라엘혁신청 부사장. /이신태PD

이스라엘혁신청은 로컬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지역 내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인큐베이터의 예산을 최대 85%까지 지원하거나, 연구소·생산시설 등 기반 시설을 세울 때 필요한 비용의 50~60%를 지원해준다.

특히 ‘지역 맞춤형’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게 특이점이다. 가령 농지가 많은 북부엔 푸드테크 스타트업을, 사막 지대엔 태양광 스타트업을, 군부대가 주둔한 도시에는 사이버 보안 스타트업을 유치하는 식이다.

이스라엘 로컬 스타트업들은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노비즈의 데이비드 오버만(David Oberman) 아시아 부사장(VP)은 “고급 인력이 많은 스타트업의 특성상 급여 수준이 높기 때문에 현지에서 생활하면서 쓰는 비용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말했다. 또 스타트업이 현지 인재를 채용하고, 지역 내 다른 기업들과 협업하면서 산업 생태계도 구축하게 된다고 한다.

이스라엘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앞으로 더 많은 스타트업들이 지방으로 거점을 옮길 것으로 내다봤다. 어반에어로노틱스의 오퍼 시프리스 CTO는 “코로나19 사태 당시 재택 근무로도 업무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비싼 임대료와 교통 체증을 감내하며 도심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스라엘혁신청의 지비 부사장도 “임대료가 저렴하면 그만큼 생산 시설을 늘릴 수 있고, 사막이라면 태양열을 통해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주어진 환경만 잘 활용한다면 회사의 위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농지엔 푸드테크, 사막엔 태양광… 이스라엘은 거대한 스타트업 실험장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