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해운업계에서 민간 선박 금융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의 긴축에 따른 경기 둔화 우려와 함께 해상 운임은 정점을 지났는데, 앞으로 환경 규제 등을 고려할 때 해운사들은 오히려 선박 투자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8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한국해양진흥공사 주도로 추진 중인 ‘선박 조세 리스제(Tax Lease)’에 대한 조세 특례 예비타당성 조사가 진행 중이다. 선박 조세 리스제는 선박을 도입할 때 고속 감가상각을 통한 세제 혜택을 이용해 선박 구입비용을 줄이는 금융기법으로 프랑스와 영국, 일본 등에서 제도화돼 있다. 선박 조세 리스제를 통해 선박을 도입할 경우 해운사의 비용 부담이 10%가량 줄어들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일 오전 부산항 신선대부두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선박 조세 리스는 계약마다 차이가 있지만 큰 골자는 이렇다. 우선 선박 도입을 위한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해 투자금을 모으고, 선박을 소유한 SPC가 해운사에 선박을 빌려준다. SPC는 용선 수익과 별개로 최대 25년인 선박의 수명을 5년 내외로 단기 설정해 고속 감가상각으로 장부상 이익을 축소하거나 적자를 낸다. 이런 손실을 넘겨받은 투자자는 법인세 등의 세금을 절감할 수 있고, 수익의 일부를 다시 해운사와 공유한다. 최종적으로 선박 감가상각이 마무리되면 해운사가 SPC 지분을 인수해 선박 소유권을 확보하게 된다.

앞서 연구 용역을 진행한 조세재정연구원은 선박 조세 리스제를 도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선박 조세 리스는 쉽게 말해 정부가 세수(稅收)를 손해 보는 대신 민간 선박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이라며 “일반적인 선박 리스보다 투자자는 투자금을 빨리 회수할 수 있고, 해운사도 선박 도입이 쉬워지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과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등은 선박 투자를 늘릴 방안으로 선박 조세 리스제와 함께 ▲선박투자회사제의 투자자 세제혜택 재도입 ▲공공기관이 선박을 소유하고 국적선사에 용선하는 공공부문 선주사업 확대 ▲선박 매매(Sales and Purchase) 시장 활성화 등을 꼽았다.

해운업계에서 민간 선박 금융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위기감 때문이다. 당장 금리 인상에 따른 여파가 적지 않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1%였던 기준금리가 올해 2.5%로 오르면 국내 127개 해운기업의 이자 비용이 8287억원(58%) 늘어난다. 현금이 풍부하지 않은 중소형 해운사들의 부담이 커진다는 의미다.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해상 운임은 내림세로 돌아섰다. 컨테이너선 운임지표인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지난 1일 기준 4203.3으로 연고점(5109.6)보다 17.7% 내렸고, 건화물(벌크)선 운임지표인 발틱운임지수(BDI)도 지난 6일 기준 2043으로 5월 이후 40% 떨어졌다.

해운사들은 국제해사기구(IMO) 등의 환경 규제에 따라 오히려 선박 투자를 늘려야 한다. 해양수산부 조사 결과 국적선사가 보유한 선박 10척 가운데 7척이 2023년부터 도입되는 현존선박에너지효율지수(EEXI)를 충족하지 못하고, 10척 가운데 3척은 탄소집약도(CII) 등급제 제재 대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새로 만드는 선박의 가격(신조선가)은 클락슨 신조선가지수(Newbuilding Price Index) 기준 2020년 12월 이후 19개월 연속 올랐다. 그만큼 해운사의 선박 건조 비용이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 선박 투자를 활성화하지 않으면 결국 해운사가 선박 도입 비용과 위험요인을 모두 떠안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한진해운 사태’ 때처럼 호황 때 배를 비싸게 들여와, 불황 때 배를 헐값에 처분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현재 국적선사가 선박을 도입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며 “선박을 국가 전략자산으로 보고 정부가 과감한 정책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