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항공청(FAA)이 5G(5세대 이동통신) 서비스를 공항 인근에서도 허용하기로 결정하면서 글로벌 항공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 내 5G 주파수와 항공기가 고도를 측정하는 전파의 주파수 대역이 너무 가까워 자칫 주파수 교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항공사들이 고도 측정 장비를 교체할 때까지 B777 등 일부 기종의 운항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노선을 운항 중인 국내 항공사들도 대책 마련이 불가피하다.

20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FAA는 미국 통신업체 AT&T, 버라이즌 등과 내년 7월 이후부터 공항 인근에서도 5G 서비스를 개시하도록 합의했다. 이에 미국 항공사들에 공문을 보내 늦어도 내년 7월까지 항공기에 장착된 전파고도계(Radio-altimeter)를 교체하거나 개선해 주파수 간섭에 따른 위험을 최소화하라고 요구했다.

대한항공의 보잉 777-300 항공기 모습. /대한항공 제공

FAA가 항공사들에 전파고도계 교체를 요구한 이유는 미국 통신업체들이 5G 서비스를 3.7~3.98기가헤르츠(㎓) 중대역 주파수에서 사용하겠다는 계획 때문이다. 통상 항공기 전파고도계가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은 4.2~4.4㎓다. ±10% 오차가 적용될 경우 3.78~4.84㎓까지 대역폭이 확대될 수 있다. 자칫 5G와 전파고도계의 주파수가 겹칠 수 있다는 뜻인데, 이때 신호 간섭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항공업계의 주장이다.

항공사들이 5G 주파수 대역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안전 문제 때문이다. 전파고도계는 지표면에 쏜 전파가 반사돼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항공기가 지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알려주는 장비다. 항공기가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고 지상의 장애물과 충돌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특히 착륙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전파고도계가 오작동을 일으키면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데, 2009년에 발생한 터키항공 추락사고도 전파고도계 오작동이 원인으로 꼽힌다.

전 세계 항공업계는 FAA의 결정에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이사회에 속해 있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지난 17일 “(FAA 결정이) 굉장히 실망스럽다”는 입장문을 내놨다. IATA는 FAA가 항공사들에 내년 7월까지 전파고도계 교체를 요구하고 있지만, 1년 안에 교체가 가능할지 미지수란 입장이다. 항공사들은 전파고도계 교체에 따른 비용에도 부담을 느끼고 있다.

한국의 5G 주파수는 3.42~3.7㎓ 대역을 이용하기 때문에 전파고도계 주파수와 일정 수준 이격돼 있어 교란의 우려가 적다. 하지만 미국 노선에 취항해 있는 대형항공사(FSC)들이 문제다. 앞서 올해 1월 25일 FAA는 국내 항공사들이 장거리 노선에 투입하는 B777, B747-8 등의 전파고도계가 5G의 간섭을 받을 수 있다고 공지한 바 있다. 대한항공(003490)은 현재 B777 기종을 총 53대(화물기 12대 포함), 아시아나항공(020560)은 9대를 보유하고 있다. B747-8은 대한항공이 총 16대(화물기 7대 포함)를 보유하고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FAA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만큼 장기적으로 전파고도계 교체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날씨가 맑을 때는 조종사가 전파고도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수동 조종을 통해 무사히 착륙할 수 있지만, 악천후로 시야가 나쁠 때는 전파고도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관계자는 “전파고도계를 교체하기 전까지 날씨가 안 좋을 경우 미국 노선에 특정 기종을 투입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홍인기 경희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일부 항공기 기종에서 전파고도계가 사용하는 주파수와 다른 특정 주파수를 분리해주는 필터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국내 항공사들도 필터 교체 또는 개선 등의 대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