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SK에너지 박미주유소. 이곳 건물 2층 옥상엔 2m 높이의 연료전지 7대와 변압기 등 관련 시설이 귀에 거슬리는 소음 없이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총 15톤(t) 무게에 달하는 이곳 연료전지가 지난 한달 동안 만들어낸 전기는 약 313메가와트시(MWh)로, 연간 생산량으로 환산하면 2500MWh에 달한다. 이는 현대차(005380)에서 생산한 전기차 ‘아이오닉5′를 약 4만3000번 충전할 수 있는 양이다. 주유소 뒷편엔 이 전기를 바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전기차 충전기 두 대가 마련돼 있었다.

기름 냄새가 가득했던 주유소가 친환경 자동차 시대를 맞아 종합 에너지 공급 거점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연료전지와 태양광 발전기를 주유소 내에 설치해 전기를 직접 만들고, 이를 전기차 충전에 사용하는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이 대표적이다. SK에너지가 추진하는 이 모델은 과열 경쟁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주유소 업계의 수익 돌파구가 돼줄 뿐만 아니라 지역별 청정 에너지 보급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수단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 연료전지, 에너지 효율 높은데 탄소 배출·화재 위험 낮아

박미주유소는 국내 1호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이다.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은 연료전지, 태양광 등 분산 에너지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부의 추진전략 중 하나다. 박미주유소는 휘발유와 경유 등 기름을 파는 전통 주유소였지만 지난해 5월 SK에너지가 산업통상자원부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주유소 내 연료전지를 설치할 수 있도록 예외를 인정받았다. 이에 지난해 11월 재단장을 시작, 연료전지를 비롯해 태양광 발전기, 전기차 충전기 등을 갖추고 지난 2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연료전지는 양쪽 전극을 이어주면 전기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전지의 기본원리와 유사하지만, 수소와 천연가스 등 연료를 공급해주면 계속 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발전기로 분류된다. 투입 원료 대비 전기 생산량을 뜻하는 에너지 효율은 전통 에너지원 대비 높은 편이다. SK에너지가 사용하는 연료전지는 현재 연료전지 중 가장 발전된 형태로 천연가스와 수소 모두 연료로 활용할 수 있는데, 효율은 60% 안팎에 달한다. 40%대에 불과한 화력발전소보다 훨씬 높다.

게다가 연료의 연소반응 없이 전기화학반응만으로 전기를 만들기 때문에 기존 내연기관보다 친환경적이다. 실제 전기 1MWh당 연료전지는 343.2kg의 탄소를 배출하는데, 이는 유연탄(819.3kg)과 중유(677kg)의 42~50% 수준에 불과하다. 대기오염물질인 황산화물은 배출량이 ‘0′이고, 질소산화물은 0.001kg로 유연탄(2.7kg)과 중유(1.5kg)에 비하면 크게 낮은 수준이다.

SK에너지 관계자는 “전국 주유소·충전소 1만3000개소에 300킬로와트(kW)짜리 연료전지를 설치한다고 가정하면, 4기가와트(GW) 규모 화력발전소 8기를 대체할 수 있다”며 “탄소 배출량 역시 같은 규모 화력발전소의 절반인 1200만t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름이나 액화석유가스(LPG)를 판매하는 주유소 내에 설치되는 만큼 화재나 폭발 위험이 적어야 하는데, 연료전지는 안전하다는 것이 SK에너지 측 설명이다. SK에너지 관계자는 “연료전지는 전기 축적 기능이 없어 과충전에 의한 발열 가능성이 없고, 양쪽 전극 사이에 들어가는 전해질 역시 고체 세라믹 또는 금속 소재로 돼 있어 화재 위험에서 안전하다”고 말했다. 실제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2016년 지진, 2017년 산불이 발생했지만 이곳에 설치된 연료전지는 모두 화재 없이 정상 가동됐다. 일본에서 가정용 소규모 발전기로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다.

연료전지의 안전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SK에너지는 여기에 겹겹의 안전장치를 또다시 추가했다. 연료전지에 공급되는 천연가스의 배관 등에서 사고를 막기 위해 가스누출과 화재 등을 24시간 감시하는 시스템과 원격 차단 시스템 등을 설치한 것이다. 게다가 주유소 안팎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해도 연료전지는 안전하다. 박미주유소 연료전지는 회색 판넬의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화재로부터 1시간까지 지켜주는 특수 소재로 만들어졌다. SK에너지 관계자는 “연료전지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해도 주변으로 화재가 번질 위험이 없고, 바깥 화재가 연료전지에 옮겨붙을 위험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4일 찾은 서울 금천구 시흥동 SK에너지 박미주유소 뒷편에 전기차 충전기 두 대가 설치돼 있다./SK에너지 제공

◇ 尹 당선인·서울시도 “연료전지 확대”… 위험물관리법 규제완화 필수

SK에너지의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은 최근 경쟁 과열로 문을 닫고 있는 주유소 업계에 새로운 수익 모델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발전 규모가 작고 도심에 설치하는 발전기여서 추가로 송변전 시설 설치가 필요하지 않은 데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전력 자립률도 높일 수 있다. 산업부와 소방청이 규제샌드박스로 승인한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대선 과정에서 주유소·LPG 충전소 내 설치가능 건축물에 연료전지를 포함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바 있다. 서울시 역시 지난 21일 공공시설에 53㎿ 규모의 연료전지를 보급하고,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을 2030년까지 서울시 전체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을 확대하려면 주유소 내 연료전지 설치를 금지한 위험물안전관리법이 완화돼야 한다. 규제샌드박스로 예외를 인정받긴 했지만, 소방청이 해당 규제를 정식으로 풀어주지 않으면 SK에너지는 총 10호까지만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을 열 수 있다. 발전사업자가 전기판매업을 겸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전기사업법도 걸림돌이다. 주유소 내에 연료전지와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한다 해도, 이를 전기차 충전에 직접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박미주유소는 연료전지로 만든 전기를 아직 전기차 충전기에 쓰지 못하고 한국전력(015760)에 판매하고 있다.

SK에너지가 연료전지 안전성 입증에 공을 들이고 있는 만큼 소방청도 규제 완화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SK에너지는 규제가 풀리면 2025년 수도권 중심으로 1000개, 2030년 전국 3000개까지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