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완성차 1위 업체 폭스바겐그룹이 투자한 스웨덴 배터리 스타트업 노스볼트가 최근 삼성SDI(006400) 직원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 폭스바겐도 배터리 개발 총괄 책임자로 한국인을 영입하면서 유럽이 한국인 배터리 인재를 흡수하는 블랙홀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업계에서 나온다.

2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폭스바겐의 전기차 배터리 협력사인 노스볼트는 올들어 한국 배터리 인력을 대거 영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스볼트는 2019년에 30여명의 한국, 일본 직원들이 자사에서 근무 중이라고 공식 발표한 바 있는데, 한국인 직원은 주로 2016년 창립 초기에 이직한 LG에너지솔루션 출신들이었다. 올해 들어서는 각형 배터리 개발을 위해 삼성SDI 출신을 대거 영입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국내외 헤드헌팅 업체들이 국내 배터리 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노스볼트 등 유럽 기업으로의 이직을 알선하기도 한다.

폭스바겐은 2030년까지 자사 전기차 80%에 각형 배터리를 탑재할 계획이다. 이에 노스볼트는 각형 배터리가 주력인 삼성SDI 출신 엔지니어 영입에 나선 것이다.

노스볼트는 1기 공장 라인을 저렴한 중국 장비로 채웠다가 제품 생산에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 생산시설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 일본인 직원이 많았던 이유에서다. 이에 2기 라인에는 메인 장비업체를 한국 기업으로 변경했다. ▲씨아이에스(222080)(전극공정 장비) ▲제일기공(믹싱 장비) ▲원익피앤이(217820)(충·방전 장비) ▲이노메트리(302430)(검사 장비) 등 국내 기업이 공급망에 진입했다. 노스볼트 입장에서는 한국인 직원을 더 채용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SDI 직장인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에 경쟁사 대비 투자가 더디다면서 해외 업체로 이직하자는 불만 글이 계속 올라왔다”며 “노스볼트가 좋은 조건을 제시해 실제 이직하는 사례가 계속 나오는 것으로 안다. 아직 파일럿 생산 단계인데 생산라인을 본격 가동하는 시점이 오면 국내 인력을 대거 흡수할 수도 있다”고 했다.

노스볼트 스웨덴 기가팩토리 조감도

폭스바겐은 최근 배터리 개발사업부문 ‘파워코(PowerCo)’ 총괄 책임자로 안순호 박사를 영입했다. 안 박사는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006400) 임원을 거친 배터리 전문가로 꼽힌다.

안 박사는 1996년 LG화학(051910)에 입사해 배터리연구소 연구위원(상무)까지 지낸 뒤 2015년 삼성SDI로 이직해 배터리연구소 차세대연구팀장(전무)을 역임했다. 안 박사 영입을 위해 삼성SDI가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이후 2018년 말 애플로 이직해 배터리 부문 글로벌 개발 총괄 대표(Global Head of Battery Developments)를 맡아 배터리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안 박사는 애플의 자동차 프로젝트 ‘타이탄(Titan)’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에서 근무한 지 3년여 만에 다시 폭스바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 박사는 폭스바겐의 배터리 셀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배터리 업계에서는 안 박사의 폭스바겐 이직을 두고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폭스바겐은 지난 3월 ‘파워데이’를 통해 2030년부터 유럽 내 6개 지역에 생산 기지를 구축하고 전기차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폭스바겐은 현재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지만, 2024년부터 세계 1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폭스바겐은 국내 배터리 3사인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의 제품을 모두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폭스바겐이 배터리 내재화를 선언하자 한동안 국내 배터리 기업의 주가가 내리막을 걷기도 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폭스바겐의 배터리 내재화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폭스바겐이 10년 내에 배터리를 자체 생산할 수는 있지만, 같은 기간 국내 배터리 기업의 기술력이 더 발전해 기술 격차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자의 선택에 따라 성능이 뛰어난 국내 기업의 배터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안 박사가 폭스바겐으로 이직하면서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 업계에서 나온다. 국내 배터리 인력이 해외 기업으로 스카웃되는 경우는 많지만, 안 박사처럼 국내 기업에서 배터리 개발을 총괄했던 고위 임원이 해외 완성차 업체 배터리 총괄로 이직한 사례는 처음이다. 폭스바겐이 안 박사를 영입한 것 역시 각형 배터리 개발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안 박사를 시작으로 국내 배터리 인재들이 대거 폭스바겐으로 옮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업계에서 나온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최근 몇년간은 중국 업체들이 국내 기업보다 3~4배 많은 연봉을 제시해 배터리 인재들 수백명을 스카웃해갔다”며 “폭스바겐을 중심으로 유럽 기업들이 배터리 시장에 진출하면서 최근에는 유럽행을 원하는 한국 직원들이 많다. 기술자들이 대거 넘어가면 기술 격차가 줄어드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