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업계가 선박 기자재 자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간 유럽과 미국 등 해외 기업에 의존해 왔던 선박 기자재 및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수익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조선업계는 기자재 국산화를 통해 매년 수천억원씩 유출되는 외화를 줄이고 친환경 장비도 자체 개발해 중국 등 경쟁국과의 격차를 유지하겠다는 계획이다.

◇ 배 한척당 100억원씩 주던 화물창 기술 국산화 추진

22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2024년까지 약 252억원을 투입해 일명 한국형 액화천연가스(LNG)선 화물창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지난달 20일 국립목포대를 ‘친환경선박용 극저온 단열시스템 실증기반 구축사업’ 주관기관으로 선정하고 관련 기술개발과 실증사업에 착수했다. 현대삼호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010140) 등 조선 3사 뿐 아니라 포스코, 한국카본(017960), TMC 등 다른 기업체들도 컨소시엄으로 이 사업에 참여한다.

케이씨엘엔지테크가 개발한 'KC-1' 화물창 내부 모습. /케이씨엘엔지테크 제공

화물창은 국내 조선업계가 강점을 지닌 LNG선의 핵심 기자재로 꼽힌다. LNG 화물창은 내부의 천연가스가 액체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영하 163도 이하의 극저온 상태를 일정하게 지켜야 한다. 극저온 화물창의 성능이 요구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단열성능이 떨어지거나 폭발할 수 있어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된다.

국내 조선사들은 전세계 LNG선의 70% 이상을 수주하고 있지만, LNG선의 화물창(멤브레인형) 기술 특허권은 프랑스 업체 GTT가 가지고 있어 LNG 선박을 한 척 지을 때마다 100억원가량을 GTT에 기술료(로열티)로 지불한다. 올래 5월 기준 17만4000㎥급 LNG선 가격이 1억8900만달러(2143억원)인 점을 고려하면 선가의 약 5%에 달한다.

LNG 화물창의 국산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으나 시장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가스공사(036460)와 한국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의 합작사인 케이씨엘엔지테크(KLT)가 정부 지원을 받아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총 197억원을 투입해 첫 국산 LNG 화물창 KC-1을 개발했다. 그러나 KC-1의 일일 기화율이 0.11%로 GTT의 화물창 기술 ‘마크3 플렉스 플러스’(0.07%)보다 높았고 KC-1을 탑재한 일부 선박에서 결함이 발견되면서 널리 쓰이지 못했다.

KLT는 다시 정부로부터 총 104억원을 지원받아 내년까지 ‘KC-2’라는 이름의 LNG선 화물창 개발을 추진 중이다. 이번에 새롭게 개발 중인 KC-2는 기화율을 GTT와 동일한 수준인 0.07%까지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화물창 개발이 완료되면 목포대에서 실증 작업을 거친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조선 시장이 워낙 보수적인 탓에 새로운 화물창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 있지만, 기술력 부분에선 한국이 가장 앞서 있어 시간이 지나면 국산기술로 점차 교체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한국조선해양이 건조한 LNG운반선. /한국조선해양 제공

◇ 친환경 기자재도 국산화중국과 격차 더 벌린다

환경 규제에 따라 최근 수요가 높아지고 있는 친환경 선박의 핵심 기자재도 국산화를 추진 중이다. 한국조선해양은 지난 5월 친환경 연료 엔진 기술의 핵심인 ‘저인화점 연료 분사장치’를 개발했다. 영하 104도의 낮은 인화점을 가진 액화석유가스(LPG)는 물론, 메탄올, 암모니아 등의 저인화점 연료를 하나의 분사장치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디젤 연료 역시 병행해 사용이 가능하다.

선박엔진 연료는 그동안 액화천연가스(LNG), 디젤 등이 주로 사용됐다. 최근 탄소 배출이 적은 저인화점 연료가 미래 선박연료로 각광받고 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까지 선박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8년 대비 50% 이하로 줄이라고 규정했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달부터 효성중공업(298040)과 ‘대용량 영구자석형 축발전기모터(SGM)’를 개발하고 있다. 축발전기모터는 엔진 축의 회전력을 활용해 선박 추진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는 장비다. 연료 효율은 높이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줄일 수 있어 대표적인 친환경 신기술로 꼽힌다. 앞서 지난 2019년 유도기 방식의 축발전기모터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대규모 용량이 필요한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경우 수입 제품에 의존하고 있어 국산화가 절실했다.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액화천연가스(LNG)선. /삼성중공업 제공

대우조선해양은 기존 방식이 아닌 ‘영구자석’을 활용해 신기술 개발을 추진 중이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연료 효율을 기존 대비 약 3% 높일 수 있다. 또 크기가 작아 선형 변경에 따른 공간적 제약을 탄력적으로 극복할 수 있어 선박의 크기나 선종에 구애받지 않고 축발전기모터를 적용할 수 있다.

조선업계는 친환경 선박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는 만큼, 핵심 기자재를 국산화하면 수익성과 수주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자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선 기술력이 핵심”이라며 “건조 이력을 바탕으로 발주가 이뤄지는 만큼 기술 격차를 벌려 놓으면 중국이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에서 발주된 LNG선박 총 52척(430만CGT) 가운데 36척(308만CGT)을 한국조선해양·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 3사가 수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