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공장’ 중국을 중심으로 구축된 글로벌 밸류 체인(GVC·Global Value Chain)이 변곡점을 맞고 있다. 기존 저비용 고효율을 위해 세계 각국에 있는 기업이 분업해 원자재 및 부품을 조달하고 제품을 생산했다면, 이제는 국가 간 갈등, 코로나19, 지진 등 예상치 못한 리스크를 대비해 부품 조달, 제품 생산 등을 다변화하고 있다. GVC의 유연성, 안정성, 신뢰성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코노미조선’은 중국이 20년 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후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과정과 현재 미국과 중국 두 진영으로 나뉘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현상을 분석했다. [편집자 주]

대만 폭스콘은 올 1월 베트남 정부로부터 아이패드와 맥북 생산공장 건설 허가를 받은 데 이어 인도에서 3월부터 아이폰 위탁생산 공장 가동을 시작했다. 폭스콘을 세계 최대 전자제품위탁생산(EMS) 업체로 키운 곳은 중국이지만, 폭스콘은 현재 중국 중심의 공급망을 조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는 반년 전 예고됐다. 류샤오녠 폭스콘 회장은 지난해 6월 “‘세계의 공장'처럼 일부 국가에 (공급이) 집중된 과거의 모델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며 “폭스콘도 중국 공급망을 쪼개 다른 나라로 이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8월에는 “글로벌 공급망이 중국과 미국 진영으로 나뉠 것”이라고 했다.

◇폭스콘, 인도·베트남 생산 늘려

폭스콘은 중국이 글로벌 공급망 핵심축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일등공신이자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 중국에서만 100만 명 이상을 고용하며 현지에서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업체로 성장했다. 중국이 수출 1위 대국으로 떠오른 배경에 폭스콘이 있는 것이다. 폭스콘과 함께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TSMC도 중국을 축으로 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대표적인 수혜기업이다. 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점유율이 60%에 이르는 TSMC의 성장에는 중국이 세계 공장으로 부상하면서 반도체 수요 큰손이 된 덕분이 크다. TSMC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를 웃돌았지만, 지금은 한 자릿수대로 떨어졌다. 중국 스마트폰 업체 메이주의 부총재를 지낸 리난은 “TSMC가 화웨이란 고객을 잃어 중국 매출 비중이 22%에서 6%로 줄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중국과 무역분쟁 일환으로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공급을 제한하자 TSMC가 이를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2019년 폭스콘 인도 공장 내 스마트폰 조립라인. 폭스콘은 올 3월부터 애플 최신 스마트폰인 아이폰12를 인도에서 생산하고 있다. 블룸버그

폭스콘과 TSMC의 중국 ‘거리 두기’는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이 대조정기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폭스콘은 중국뿐 아니라 인도, 베트남, 멕시코, 브라질 등에 생산시설을 운영 중이다. 최근 베트남, 인도 등 중국 외 지역 생산 확대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2019년 미·중 무역 전쟁 본격화,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등으로 더 이상 한 곳에서만 제품을 대량 생산해 고객사에 공급하는 데 따른 한계가 크게 부각되면서 생산기지 다변화에 나선 것이다. 위탁생산 업체로서 과거 비용 절감 등 효율성을 중요시했다면 이제는 ‘위험 분산’ 등 안정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에 따라 폭스콘의 중국 내 생산 비중은 미·중 무역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인 2018년 95%에서 2020년 70~80% 수준으로 줄었고, 갈수록 더 줄어들 것으로 알려졌다. 올 3월부터는 인도 공장에서 아이폰12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는 폭스콘 최대 고객사인 애플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애플의 최신 스마트폰이 중국 이외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폭스콘이 인도 생산기지를 확충하는 건 인도의 제조업 육성정책 영향도 있지만, 스마트폰 시장 성장 잠재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도는 인구가 13억 명에 이르지만, 이 중 약 41%만이 스마트폰을 보유하고 있다. 애플과 폭스콘이 추후 공략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얘기다.

폭스콘은 인도와 함께 베트남 생산 물량도 확대한다. 현재 베트남 북동부 지역에 생산공장을 건설 중이다. 폭스콘은 애플의 아이패드, 맥북 등의 생산 일부를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긴다고 지난해 11월 26일 로이터통신이 전했고, 관련 인허가를 올해 초 베트남 정부로부터 받았다.

◇中 고객과 거래 끊는 TSMC

TSMC는 화웨이에 이어 다른 중국 고객사와의 거래도 끊으면서 중국을 자사의 공급망에서 차츰 배제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두 공급망 중 미국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4월 15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TSMC가 중국의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설계 업체인 페이텅의 반도체 생산 주문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상무부가 4월 8일 페이텅이 개발한 CPU가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무기를 개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며, 페이텅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지 7일 만에 TSMC가 페이텅과의 거래를 중단한 것이다. 지난해 미국 상무부가 세계 1위 통신장비 업체이자 중국 1위 스마트폰 업체인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자, TSMC는 화웨이와도 거래를 끊었다. TSMC의 중국 기업 거래 중단은 회사 매출의 약 60%가 애플, 엔비디아, AMD, 퀄컴 등 미국 고객사에서 발생하기에 가능한 것으로 분석된다.

당초 다른 대만 업체들과 달리 대륙에 공장을 두지 않는 등 중국과 일정 거리를 둬 왔던 TSMC는 미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TSMC는 현재 미국에서 건설 중인 생산시설에 1000여 명의 인력을 파견하기로 하고 대대적인 선발 작업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홍콩 빈과일보 등을 통해 4월 중순 흘러나왔다.

TSMC는 지난해부터 미국 애리조나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이를 위해 약 360억달러(약 40조6800억원)를 투자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공장은 TSMC의 대만 주력 생산시설의 2배 규모다. 미국 현지 생산 시스템을 구축해 애플, 퀄컴, 구글 등 핵심 고객사와 안정적으로 거래하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TSMC의 미국 생산공장 건설을 미국 주도의 반중(反中) 반도체 기술 연합 구축으로 해석한다.

◇plus point

폭스콘, 미국 첫 공장 전기차 생산도 추진

2019년 폭스콘 인도 공장 내 스마트폰 조립라인. 폭스콘은 올 3월부터 애플 최신 스마트폰인 아이폰12를 인도에서 생산하고 있다. 블룸버그

폭스콘이 미국에서 전기차 생산을 추진한다. 류샤오녠 회장은 3월 16일 대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류 회장은 “스마트폰 이익이 줄면서 전기차 시장 진출을 검토해왔다”고 했다. 폭스콘의 첫 미국 생산기지인 위스콘신 공장이 전기차 생산을 맡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폭스콘은 2018년 위스콘신에서 첫 미국 공장 기공식을 가졌고, 올해 초 서버, 5G(5세대 이동통신) 장비를 만들어 미국의 시스코 등에 납품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폭스콘은 당초 100억달러(약 11조3000억원)를 투입해 위스콘신 공장에서 LCD(액정표시장치)를 생산할 계획이었지만 업황 악화 등을 고려해 생산 계획 아이템을 계속 조정해왔다.

폭스콘은 올해 초 미국의 신생 전기차 기업인 피스커와 연간 25만 대의 전기차를 공동 생산한다고 밝힌 바 있다. 폭스콘이 애플의 아이폰을 위탁생산하는 것과 같이 피스커가 디자인한 전기차를 폭스콘이 생산하는 형태다. 폭스콘은 중국 지리자동차와 전기차 생산을 위한 합작법인도 설립했다.

폭스콘은 지난해 10월 전기차 플랫폼 ‘MIH’를 공개하기도 했다. 전기차 플랫폼은 전기차의 뼈대로, 배터리·바퀴, 구동축 등으로 구성돼 있다. 폭스콘에 따르면 이 플랫폼 위에 차체를 얹는 방법으로 간단히 전기차를 제조할 수 있다. 폭스콘은 이 플랫폼을 무료로 개방해 다른 기업이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등을 함께 개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른바 ‘폭스콘 전기차 생태계 구축 프로젝트’다. 그 생태계의 거점을 현재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이 아닌 미국에 두기로 한 것이다.

일각에선 애플이 추진 중인 자율주행 전기차 ‘애플카’를 폭스콘이 위탁생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류 회장은 “폭스콘이 애플카를 생산할 것이란 소식은 루머에 불과하다”면서도 “다른 몇몇 미국 자동차 회사와 협상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