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일가의 고(故) 이건희 전 회장 재산 상속이 본격화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008770)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의 계열분리 가능성에 관심이 쏠린다. 그간 재계에서는 이부진 사장은 호텔신라, 이서현 이사장은 삼성물산(028260) 패션부문 등 일부 계열사를 물려받아 계열분리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재계에서는 경영권을 둘러싼 삼남매의 충돌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 회장이 유서에 유족들의 주식 상속 비율을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면서 상속과 계열 분리라는 복잡한 방정식을 푸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또 코로나19 여파로 호텔과 패션 산업이 큰 타격을 입고 있는 만큼 당장 계열분리가 이뤄지진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래픽=이민경

29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일가는 이 부회장의 삼성그룹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 전 회장 보유 주식을 배분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전 회장 보유 지분은 삼성전자 보통주(4.18%)와 우선주(0.08%), 삼성생명(20.76%), 삼성물산(2.88%), 삼성에스디에스(0.01%) 등이다.

재계에서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주식을 상당수 이 부회장에게 몰아주는 방안과 삼성생명 주식은 이 부회장이 대부분 상속하되 삼성전자는 유족들이 나눠 갖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전자의 경우 이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은 강화되지만, 이 부회장이 감당할 상속세 부담이 크다. 상속세 마련을 위해 배당성향이 강한 삼성전자 지분을 유족들이 고루 나눠가져야 할 필요성도 있다.

삼성 일가는 지분 상속과 함께 삼남매의 계열 분리도 함께 협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에게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높여주는 대신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이사장은 다른 계열사를 물려받아 독립 경영을 보장받는 식이다.

이 전 회장이 경영활동을 할 때도 이부진 사장은 호텔신라 경영에 주력해왔다. 2001년 호텔신라에 입사한 이후 경영전략담당 상무와 전무를 거쳐 2011년 호텔신라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후 삼성그룹의 호텔·면세점 사업을 이끌어왔다. 이서현 이사장 역시 삼성물산 패션 부문(옛 제일모직) 사장과 제일기획 경영전략담당 사장을 지내면서 패션과 광고 사업을 담당했다. 2018년 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엔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는 이 전 회장의 의중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2010년 당시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가전전시회(CES 2010)를 찾은 삼성 일가. 왼쪽부터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 전 회장, 부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장, 차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앞서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은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력 계열사를 맡기고, 장남인 고 이맹희 명예회장에게 CJ그룹을, 5녀인 이명희 회장에겐 신세계그룹 등 계열사를 넘겨줬다. 이건희 회장과 이맹희 명예회장은 생전에 갈등의 골이 깊었지만, 이명희 회장이 신세계를 계열분리할 때는 별다른 마찰이 없었다.

계열분리가 당장 이뤄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삼성 일가가 삼성생명 상속지분을 나누지 않고 금융당국에 대주주 변경 신청을 했다는 점에서 이 전 회장이 유서에 명확한 주식 배분 방식을 담지 않았거나 유동적인 방식을 언급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삼성 일가는 당장 이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 강화와 상속세 납부를 전제로 한 주식 배분이 급선무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호텔, 면세점, 패션 산업이 직격탄을 맞은 상황이라 무리한 계열분리를 하진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호텔신라는 지난해 1853억원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역시 지난해 매출액이 1조5450억원으로 전년 동기(1조7320억원) 대비 10.8% 줄었고, 36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앞서 형제간 계열분리를 해 독립한 기업들이 위기 때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례도 많았다”며 “코로나19로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이 계속되는 상황이라 일단 삼성그룹 내에 남아 있는 선택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당분간 삼성그룹은 계열사 사장단이 이끄는 자율경영 체제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2017년 미래전략실 해체하고 삼성전자 등 전자 계열사, 삼성물산 등 비(非)전자 제조 계열사, 삼성생명 등 금융 계열사 등 3개 소그룹 체제를 구축했다.

재계에서는 삼성 일가의 주식 상속 과정에서 과거 다른 재벌기업에서 자주 벌어진 ‘형제의 난’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선대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적잖은 진통을 겪은 이 전 회장이 생전에 미리 자녀들에게 경영 승계에 대한 확답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삼성 일가가 ‘장자 승계, 형제 분리경영’ 원칙을 고수하는 LG(003550) 사례를 참고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LG그룹은 고 구인회 창업주 때부터 장남이 그룹 경영권을 이어받고 동생들은 계열을 분리해 독립경영을 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경영권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그 결과 LG그룹은 지금까지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잡음이 없었다.

LG그룹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동생인 고 구철회씨 자녀들은 1999년 LG화재(현 LIG)를 들고 나갔다. 다른 동생들인 구태회·구평회·구두회씨는 2003년 계열 분리해 2005년 LS그룹을 만들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외아들 구광모(가운데 하얀 점선) LG전자 상무가 그룹의 지주회사인 ㈜LG의 등기이사에 오르며, LG그룹 후계 대비 작업이 공식화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4월 LG그룹 오너 가족들이 구자경 명예회장의 미수(米壽·88세)연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있는 장면. 앞줄 왼쪽에서부터 구본무 LG회장 부부, 구 명예회장, 구 회장의 장녀 연경씨. 뒷줄 왼쪽부터 구본준 부회장 부부, 구광모 상무,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부부.

2세대에서는 구자경 회장의 첫째 동생인 고 구자승 전 LG상사 사장의 자녀들이 2006년 LG패션을 분사해 독립했고, 2014년에 사명을 LF로 바꿨다. 둘째 동생인 구자학 회장은 LG유통(현 GS리테일)의 FS사업부를 들고 나가 아워홈을 설립했다.

고 구본무 회장이 2018년 별세한 뒤 전통에 따라 LG그룹은 구광모 회장이 넘겨받았고, 구자경 전 LG그룹 명예회장의 셋째 아들이자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준 전 LG그룹 고문이 LG상사와 판토스, LG하우시스 등을 이끌고 LX그룹으로 계열 분리했다. 앞서 1996년 구자경 회장의 차남인 구본능 회장이 희성금속, 국제전선, 한국엥겔하드, 상농기업, 원광, 진광정기 등을 들고 나가 희성그룹을 세운 바 있다.

경영 승계 과정에서 ‘왕자의 난’으로 갈등을 겪었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도 일찌감치 정의선 회장을 후계자로 선택하고 경영 승계 작업을 진행했다. 정 회장이 외아들인 이유도 있지만, 정 회장의 누나인 정성이 이노션 고문, 정명이 현대커머셜 총괄대표 및 현대카드 브랜드부문 대표, 정윤이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사장이 승계 과정을 문제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