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바깥 벽을 흐릿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감싼 것처럼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금빛 조명이 쏟아졌다. 천장에는 금빛 조명이, 벽에는 은빛 금속 소재 타일이 반짝인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빨강, 노랑, 검정, 초록, 색동 저고리의 소매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가방과 운동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은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의 서울 한남동 플래그십스토어(대표 매장)인 ‘구찌 가옥(Gucci Gaok)’이다. 지난 1998년 한국 내 첫 플래그십스토어를 강남구 청담동 명품거리에 연 지 23년 만에 출점한 단독 매장이다.

'구찌 가옥' 1층에 전시된 보석 제품과 플래그십스토어 한정 상품인 여행가방들. /유한빛 기자
'구찌 가옥'에서만 판매하는 제품들. 한복의 색동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았다. /유한빛 기자
'구찌 가옥'에서만 판매하는 색동 디자인 장신구들. /유한빛 기자
한국적인 디자인을 반영한 '구찌 가옥'의 전용 포장재. /유한빛 기자

29일 문을 연 ‘구찌 가옥’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우선 한국 내 두 번째 플래그십스토어를 서울 강북 지역, 상대적으로 2030세대가 주로 찾는 한남동에 열었다. 상권이 성숙한 부촌에 입점하는 전통적인 명품 브랜드의 행보를 고려하면 이례적인 선택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주소지가 아닌 고유한 이름이 붙은 매장이기도 하다. 구찌의 플래그십스토어는 대개 거리 이름에서 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몬테 나폴레옹점’, 미국 뉴욕의 ‘뉴욕 5번가점’, 서울 ‘청담점’ 등이 모두 이 공식을 따랐다. 반면 구찌 가옥은 한국의 전통 주택인 ‘가옥(家屋)’에서 따왔다. ‘집’으로 대표되는 한국 고유의 환대 문화를 반영해 매장 방문객들이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는 뜻을 담았다.

매장 디자인 역시 개성적이다. 플래그십스토어는 브랜드 이미지를 극대화한 단독 매장인만큼 브랜드 고유 색과 로고, 역사 등을 강조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구찌 가옥의 외관은 한국 조각가 박승모 작가와 협업해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로 꾸몄다. 상상의 숲에서 영감을 얻은 ‘환(幻·헛보임)’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구찌 가옥은 지상 1~4층, 약 1015 ㎡ 면적으로 조성됐다. 건물로 들어서면 한국 전통 무늬로 꾸민 바닥과 1970년대 클럽 분위기를 반영한 금속 인테리어와 조명이 어우러진다. 한국적인 느낌을 살리면서도 화려한 복고풍으로 꾸몄다.

구찌의 플래그십스토어 '구찌 가옥' 매장에 전시된 제품들. /유한빛 기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상품들도 갖췄다. ‘가옥’이라는 단어를 새긴 여행가방과 색동 디자인 제품군이 이 매장에서 단독으로 판매된다. 구찌 보석류 중에서 가장 고가인 ‘프리미엄’ 제품군과 한국 색동 문양에서 영감을 받은 ‘바이아데라’ 제품들, ‘허베리움’ 디자인 찻잔과 접시 등 식기도 구찌 가옥에서 소개된다.

구찌의 ‘허베리움’ 디자인 식기. /유한빛 기자
국내에서는 최초로 '구찌 가옥'에서 선보이는 구찌의 최고급 보석 제품군인 '프리미엄'에 속하는 장신구들. 한국에는 디자인당 1점씩만 입고됐다. /유한빛 기자

조혜선 구찌코리아 부장은 “구찌 가옥은 2018년 말~2019년 초부터 준비한 프로젝트로, 구찌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크리에이티브디렉터가 매장 콘셉트와 인테리어 등 전반에 관여했다”면서 “구찌가 한국 명품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매장 곳곳에 전기 콘센트를 갖춘 의자를 두고, 인터랙티브 아트(관람자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예술 작품) 같은 즐길거리를 마련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오프라인 매장을 재미 있는 체험 공간으로 꾸민 것이다.

'구찌 가옥'에서 방문객이 직접 스크린을 눌러 디자인할 수 있는 '고사상' 그래픽. 한국 고사 문화를 구찌식으로 재해석했다. /유한빛 기자
구찌의 플래그십스토어 '구찌 가옥'에는 브랜드 디자인과 한국적인 미를 융합한 즐길거리가 마련돼 있다. /유한빛 기자

구찌의 이같은 행보는 명품 소비자의 세대 교체를 반영하기도 한다. 명품시장의 새로운 큰 손으로 떠오른 MZ세대(1980년대 출생한 밀레니얼세대와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Z세대)가 선호하는 지역으로 직접 뛰어들었고, 소비를 통해 재미를 추구하는 ‘펀슈머(Funsumer)’를 겨냥했다.

한강진역에서 이태원역으로 이어지는 이태원로는 MZ세대 사이에서는 ‘꼼데길(꼼데가르송 길)’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이 길의 초입에 패션브랜드 ‘꼼데가르송’의 한남점 매장이 있기 때문이다. 꼼데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는 아니지만 MZ세대가 선호하는 디자인과 콘셉트를 가진 고가 브랜드들이 속속 진출하면서 ‘신(新) 명품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명품거리인 '꼼데길'이 시작되는 꼼데가르송 한남점. /유한빛 기자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단독 매장을 낸 고급 향수 브랜드 '르 라보'. /유한빛 기자

꼼데길 양쪽으로는 2030세대가 선호하는 국내외 브랜드들이 포진했다. 이탈리아 고급차 브랜드인 마세라티, 독일차 폴크스바겐의 전시장과 니치 향수 브랜드인 ‘조 말론’과 ‘르 라보’의 단독 매장이 자리잡고 있다. 신 명품 브랜드로 꼽히는 ‘메종 키츠네’와 ‘아미’ 등을 판매하는 삼성물산(028260) 패션부문의 편집숍(여러 브랜드를 모아서 판매하는 매장) 비이커와 고급 패션 브랜드 ‘띠어리’, ‘구호’ 등도 이 길에 단독 매장을 뒀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인 ‘꼬달리’와 호주 고급 화장품 브랜드 ‘이솝’ 등도 이 길에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