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형사소송법(형소법)은 1954년 미군정 법령을 토대로 제정·공포된 이래 지금까지 큰 틀을 유지하며 존속해왔다. 근간이 된 군정법령 제176호는 특히 수사 기관의 인신 구속 절차를 개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인신 구속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한 근대적, 민주적 형사 제도가 이 땅에 도입된 것이다. 피의자나 피고인의 구속 기간을 제한하는 조항도 형소법이 추구했던 규범적 목표의 일환이다. 우리 형소법은 68년 간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구속 기간의 무기한 연장을 엄격하게 금지해왔다. 그러나 구속 기간의 제한은 순기능 만큼 적지 않은 역기능을 내재하고 있다. 조선비즈는 한국 형소법에 규정된 구속 기간 제한의 장단점을 알아보고 바람직한 대안은 무엇인지 다각도로 모색해봤다.[편집자주]
인신구속 기간의 일률적 제한은 한국 법 체계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 우리 형사소송법(형소법)은 수사 단계와 재판 단계의 구속 모두 획일적으로 정해진 기간 내에 이뤄지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러나 구속 제도의 분류 방식이 우리나라와 유사한 일본, 근대 한국 형소법의 토대를 제공한 미국에서도 구속 기한을 도식적으로 정해 놓고 획일적으로 규제하지 않는다. 비교법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주요 국가들은 재판 중 구속에 기한을 두더라도 사법부의 재량으로 탄력 있게 연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속 기간의 제한을 현행법대로 유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법조계 관계자들은 피의자나 피고인의 인권 보호 차원에서 구속 기간에 제한을 둘 필요는 있으나, 일률적이고 도식적인 기한 적용은 지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해외 사례들을 참조해 보다 구속 기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방안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외 주요 국가들이 수사·재판 단계에서 구속 기간을 어떻게 정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비즈는 영미법계에 속하는 미국과 영국, 대륙법계의 중심인 독일, 그리고 우리나라와 법 체계가 가장 유사한 일본의 사례를 검토했다.
◇ 미국·독일·일본, 재판 단계서 구속 기간 ‘무제한’
미국의 경우 기소 전과 후를 통틀어 구속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연방형사소송규칙(18 U.S.C. § 3161)은 원칙적으로 공판 개시까지의 구속 기간을 30일로 정하고 있지만, 30일이 지난다고 해서 피고인을 석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이유만 있다면 기간 연장이 가능하다. 재판 중 구속 기간에도 제한이 없다.
독일은 형소법 121조에 근거해 구속 기간을 계산할 때 수사·재판 단계를 구분하지 않고 총 6개월의 한도를 설정했다. 그러나 수사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구속을 계속할 필요가 있을 때는 구속 유지를 인정하고 있어, 사실상 구속 기간에 제한이 없는 상황이다.
일본은 한국의 비교 대상으로 삼기에 가장 적절한 국가다. 우리처럼 피고인 구속(재판 중 구속)을 중심으로 형소법에 규정하고, 피의자 구속(수사 단계의 구속)은 이를 준용하는 방식을 채택 중이다.
일본의 경우 수사 단계에서의 구속 기간 제한은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 일본 형소법 제208조 및 제208조2항에 따르면, 피의자는 원칙적으로 10일 간 구속하되 “재판관이 부득이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하는 때는 검찰의 청구에 의해” 기간을 10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득이한 사유’란 사건의 복잡·곤란성, 증거 수집의 지연 등을 의미한다. 내란죄나 외환죄(적국에 이익을 제공해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만드는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5일 간 추가 연장할 수 있다. 일본 검찰은 한국 검찰과 마찬가지로 이 기간 안에 기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재판 단계에서 일본은 피고인을 사실상 무기한 구속할 수 있다. 형소법 제60조에 따르면 기소 후 2개월 간 구속이 가능한데, “계속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1개월마다 기간을 갱신할 수 있다. 형소법 제89조1·3·4·6항에 해당할 때만 기간 갱신이 무제한 가능하다고 규정돼있는데, 여기에 해당되는 내용이 광범위하다.
피고인이 사형, 무기징역 또는 단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범죄나 상습적으로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경우는 물론, 증거 인멸 우려가 있거나 피고인의 거주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도 구속 기간이 만료되기 전 1개월씩 계속 연장할 수 있다.
재경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일본은 법원이 원한다면 피고인을 평생 구속 상태로 둘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95년 ‘옴진리교 사건’”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종교 단체 옴진리교는 당시 판사를 살해할 목적으로 지하철에 사린(독성이 강한 화합물의 일종)을 살포하는 테러를 저질러 사망자 12명과 수천 명의 부상자에 피해를 입혔다. 사건의 범인들은 구속된 후 2001년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 16년 간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주요 국가 중에서는 영국 정도가 구속 기간을 제한하고 있다. 수사 단계에서는 기소 전 96시간까지만 구속이 가능하다. 기소 후에는 형사법원 이송 후 재판 전까지 182일 간 구속할 수 있다.
◇ “범죄 유형에 따라 구속 기간 탄력적 적용”… “석방 후 인신 재확보하는 장치 필요”
그동안 우리 법조계에서는 구속 기간 제한의 폐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특히 재판 단계에서의 구속 기간 제한은 재판부의 면밀한 증거 조사 및 신중한 심리를 방해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럼에도 구속 기간을 섣불리 늘리거나 기한을 없애는 데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피고인을 무기한 구속할 경우 자기 방어권 및 기본권을 제대로 보장해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유무죄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오랜 기간 구속하는 것은 피고인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라는 주장이 많이 나온다. 구속 기간을 ‘재판 가능 기간’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논리는 구속 기간 연장론을 반대하는 주요 논거가 된다.
전문가들은 구속 기간의 도식적 규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른 나라들처럼 구속 기한을 보다 탄력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재옥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모든 사건에 대해 일률적 구속 기간을 적용하는 대신, 범죄 유형에 따라 재판부의 재량으로 특별 연장 허가를 내주는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적 관심이 크거나 피해자가 많은 등 충분한 심리를 통해 정의를 실현해야 할 사건들은 구속 기간 제한의 예외로 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과거 발표된 연구 결과 중에도 주목할 만한 제언이 있다. 2013년 법원행정처의 연구용역 과제에서, 이승호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은 구속과 석방을 통합해 심사하는 구속 심사 제도를 제안했다. 조건부 석방을 영장 발부 단계뿐 아니라 발부 후에도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를 전제로 구속 기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한다면, 구속 연장의 정당성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속 기간을 지금처럼 제한하되, 피고인을 석방한 후 인신을 재확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보석보증금 납부를 조건으로 구속 효력을 정지하는 보석 제도는 영미법계 국가들이 활발히 적용 중이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우선 국내 1심 재판에서의 구속 기간을 전수조사한 뒤 적정한 기간을 재설정하고, 이 기간이 지나면 피고인을 일단 보석으로 풀어줘야 한다”며 “그 대신 검사가 중형을 구형할 경우 직권으로 보석을 취소해 피고인의 인신을 다시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