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20일(현지 시각) 본격 출범했다. 4년 만에 대통령 자리에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을 놓고 여러 분야가 이해득실을 따지기 분주하다. 과학기술계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는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번째 임기(2017~2021년)의 거의 절반 동안 공식적인 과학 자문역을 두지 않았다. 임기 후반부에 첫 번째 과학 자문역인 켈빈 드로게메이어(Kelvin Droegemeier)를 지명했지만, 드로게메이어는 공식 보좌관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탓에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작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2기 행정부에서도 이런 기조가 이어질까 우려의 시선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는 반응이 많다. 특히 인공지능(AI)과 양자과학기술, 우주탐사 분야는 트럼프 2기 시대에 오히려 투자가 늘고, 각광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과학기술 참모진 꾸린 트럼프 “미국 기술 우위 보장”

트럼프 1기 때와 가장 큰 차이는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 수장에 마이클 크라치오스(Michael Kratsios)가 임명된 점이다. OSTP는 미국 전체 과학기술 정책을 조율하는 곳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 시기에는 물리학자인 존 홀드런(John Holdren)이 OSTP 수장을 지내며 오바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전반을 이끌었다. 하지만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는 임기의 절반이 되도록 OSTP 수장을 공석으로 뒀고, 조직도 크게 축소했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 수장에 지명된 마이클 크라치오스(왼쪽)./백악관

하지만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AI 전문가인 크라치오스를 OSTP 수장에 임명했다. 보좌관 지위를 받지 못한 드로게메이어와 달리 크라치오스는 정식 보좌관 지위도 부여받았다. 홀드런 교수는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크라치오스가 보좌관 지위를 받은 건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크라치오스 자신에게도 모두 좋은 결정”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색스(David Sacks) 전 페이팔 최고운영책임자(COO)는 트럼프 행정부의 ‘AI 및 암호화폐 책임자’에 임명될 예정이다. 백악관 외부의 연구·산업 전문가들로 구성된 대통령 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 의장직도 맡는다. 로보틱스 전문가인 린 파커(Lynne Parker)는 크라치오스와 색스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크라치오스, 색스, 파커로 구성된 자신의 과학 자문팀에 대해 “과학적 혁신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내고, 미국의 기술 우위를 보장해 혁신의 황금시대를 열어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AI 및 암호화폐 책임자(White House A.I. & Crypto Czar)'에 임명된 데이비드 색스(David Sacks) 전 페이팔 최고운영책임자(COO)./AFP 연합뉴스

트럼프의 새로운 과학 자문팀에 대한 현지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미국 라이스 대학교의 케네스 에반스(Kenneth Evans) 과학정책 연구원은 네이처에 “크라치오스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몇 안 되는 밝은 부분이었다”고 말했고, 미국대학교연합(AAU)의 대정부 관계 수석 부사장인 토빈 스미스(Tobin Smith)도 “크라치오스는 과학보다는 기술을 더 잘 아는 사람이지만,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AI·양자가 미중 경쟁의 새로운 최전선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는 AI와 양자과학기술, 첨단 제조 같은 분야에 대한 투자가 늘었다. 바이든 정부에서도 이런 기조는 동일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이런 기조는 유지될 것으로 내다본다. 고윤미 KISTEP 과학기술정책센터 연구위원은 “12월말에 발표된 OSTP 인선과 데이비드 색스의 중용을 놓고 보면 기초과학보다는 기술 분야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며 “트럼프 정부에서 AI 기술 개발이 보다 활성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AI와 양자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트럼프의 대중국 정책의 일환이라는 설명도 나왔다. AI와 양자과학기술이 미중 경쟁의 새로운 최전선으로 부상했고, 이런 차원에서 AI와 양자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는 단순한 연구개발(R&D)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기술 군비 경쟁이라는 것이다.

트럼프는 1기 행정부 시절인 2020년에 미국 전역에 12곳의 국가 AI 및 양자정보과학(QIS) 연구소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런 투자 기조가 2기 행정부에서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우주탐사도 트럼프 정부에서 수혜가 예상되는 분야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 항공우주국(NASA)이 화성 탐사를 위해 만드는 대형 추진 로켓 ‘SLS’ 대신 스페이스X의 민간 우주 발사체를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 SLS는 한 번 발사하는데 드는 비용만 40억달러에 달해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트럼프의 최측근으로 부상한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CEO)는 NASA의 비효율을 여러 차례에 걸쳐 비판하기도 했다. NASA의 새 수장에 지명된 재러드 아이작먼도 머스크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미 항공우주국(NASA)의 새 수장에 지명된 재러드 아이작먼./AFP 연합뉴스

네이처는 이런 변화가 미국의 우주탐사 분야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NASA의 심우주 탐사 프로그램인 아르테미스 계획은 여러 차례 지연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중국은 이미 유인 달 탐사 계획을 시작했고, 유럽과 인도 등 다른 경쟁국도 빠르게 미국을 추격하고 있다. 네이처는 “머스크가 인간이 화성에 이주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해왔고, 스페이스X의 스타십으로 이를 달성하길 원하고 있다”며 “NASA의 계획보다 화성에 우주비행사를 보내겠다는 구상을 앞당길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감염병·환경 분야는 먹구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反과학’ 기조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2기 행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된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는 미국 내에서도 대표적인 백신 회의론자다. 케네디는 감염병에 대한 연구와 지원보다 비만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 연구를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케네디는 수돗물 불소화나 학교 백신 접종 정책에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만 이런 정책은 연방 정부가 아니라 주 정부나 지역 차원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 케네디의 영향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시행했던 ‘시도할 권리(right-to-try)’ 정책이 다시 시행될 수 있다고 본다. ‘시도할 권리’는 기존에 승인된 치료법에 효과가 없고 신약 임상시험에도 참가할 수 없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 중인 의약품 사용을 승인하는 정책이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생명윤리학자 홀리 페르난데스 린치는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고,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에는 열린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된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AP 연합뉴스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한 환경에 대한 연구도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는 유해 화학물질이나 온실가스, 공해 관련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했다. NASA나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의 환경 연구도 축소 대상이다.

트럼프는 미국 환경보호청(EPA) 수장에 뉴욕주 하원의원 리 젤딘(Lee Zeldin)을 지명했다. 트럼프의 오랜 지지자인 젤딘은 EPA의 인력을 감축하고 오염물질 규제를 완화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에너지부(DOE) 장관에 크리스 라이트(Chris Wright) 리버티에너지 최고경영자가 지명된 것도 시사점이 크다. 석유업계 주요 인사인 라이트가 에너지부 장관을 맡으면서 청정에너지 시범 사업 같은 분야는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가 재가입한 파리 기후협정도 다시 탈퇴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이 기후변화에 대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미국 에너지부(DOE) 장관에 내정된 크리스 라이트(Chris Wright) 리버티에너지 최고경영자./EPA 연합뉴스

◇韓도 영향 불가피…”국가 중심 혁신 경쟁 가속화”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한국의 입지와 위상도 변화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미중 갈등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표출될 가능성이 크고,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도 이런 대외 상황 변화를 감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현익 STEPI R&D혁신연구단 부연구위원은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패권 경쟁의 핵심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누가 더 촘촘하고 세밀하게 상대방을 감시하고 대응할 수 있는 판을 만드냐는 것”이라며 “그동안 우리는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한 민간 주도의 혁신 경쟁에만 높은 가치를 뒀는데, 앞으로는 미국도 국가 중심의 첨단 과학기술 역량 확보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부연구위원은 “한국도 이런 변화의 틈새에서 우리 몫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