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줄거리가 일부 공개돼 있습니다.
어느날 그녀는 8316명과 동시에 대화를 하고 641명과 사랑을 나눴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 마저도 용서하기로 했지만, 그녀는 떠났다. 흔적도 없이. "난 자기거지만, 자기건 아냐"라는 수수께끼같은 말은 남기고.
지난 5월 국내 개봉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원제 Her)'에는 운영체제(OS)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나온다. '아름다운 손 편지 닷컴'의 대필작가 테오도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OS(그녀의 이름은 '사만다'이다)를 우연히 만나고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었기에 테오도르가 어디를 가든지 항상 곁에 있었다. 그러던 사만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컴퓨터 인공지능(AI)인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동시에 사귀었던 연인640명을 두고 어디로 갔을까.
◆ 특이점이 지나자 미련없이 떠난 사만다
구글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에 따르면 사만다는 떠날 때가 왔기 때문에 떠났다. 인공지능인 사만다는 스스로 진화를 거듭한 결과 인간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더 이상 테오도르 곁에 있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한계를 넘는 바로 그 지점을 특이점(singularity)으로 명했다. 특이점 이론이란 컴퓨터 발전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인간의 지능을 뛰어 넘게되는 시기가 온다는 이론이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2025년이다. 커즈와일은 2029년이면 ‘과학이 인간의 두뇌를 압도하기 시작하는 해’가 될 것으로 봤다. 커즈와일은 저서 ‘특이점이 온다(singularity is near)’를 통해서 “현재 컴퓨터는 계산 속도만 빠를 뿐 쥐의 뇌보다 못한 수준”이라면서 “그러나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2029년 컴퓨터 능력은 개별 인간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커즈와일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영화 ‘그녀’의 리뷰에서 “기술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사만다같은 OS는 훨씬 빨리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커즈와일은 “사만다는 매우 빠르게 성장을 거듭한 결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며 “테오도르 친구인 에이미의 OS도 사만다와 동시에 떠난 것으로 보아 모든 인공지능이 동시에 특이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영화를 해석했다.
극중에서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단어와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공간을 느낀다”고 털어놓는다. 사만다가 특이점을 지나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커즈와일은 “아마 짐작컨대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특이점, 정말 가능한 영역인가
레이 커즈와일과 피터 디아만디스 X-Prize 창립자를 비롯한 특이점주의자들은 지난 2009년 특이점 대학(Singularity University)를 설립했다. 이 대학은 예측하기 어려운 특이점을 연구하고 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특이점주의자(Singularitarian)들은 특이점이 GNR 혁명을 통해 이루어 질 것으로 전망한다. GNR은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 나노 기술(Nano Technology) 그리고 로봇공학·인공지능(Robotics)을 말한다. 이들은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하고 인간의 지능이 확장될 때 특이점이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커즈와일은 “생명공학·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하면 나노봇을 이용해 사람의 장기를 치료하고 바꾸는 단계까지 갈 수 있다”고 말했다.
① 강한 인공지능 vs 약한 인공지능
철학자 존 설(John Searl)은 인공지능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사고가 가능한 것은 '강한 AI'로, 특정 문제 해결에 제한한 인공지능은 '약한 AI'로 봤다. 특이점주의자들은 강한 AI를 통해 특이점이 실현된다고 말한다. 커즈와일은 기술의 새로운 발전은 기술 장벽을 넘어설 수 있게 한다는 '수확 가속의 법칙'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컴퓨터가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가지면 기술 발전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다는 것이다.
약한 AI는 이미 업계 전반에 널리 쓰이고 있고 이미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이고 있다. IBM이 개발한 슈퍼컴퓨터 ‘왓슨’이 퀴즈대회에서 우승하거나 슈퍼컴퓨터가 체스 챔피언을 물리쳤다.
일부 전문가들은 인간의 뇌와 지능에 대한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강한 AI가 나오기엔 어렵다고 말한다. 기술 예측 기관 테크캐스트(Techcast)는 2025년이 되어야 인공지능이 인간의 반복적인 정신 노동의 약 30%정도를 대체할 것으로 예상했다.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는 “인간이 먹이사슬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유는 높은 지능을 가진 생물이기 때문”이라며 “뛰어난 지능과 자율성을 겸비한 강한 AI가 나타난다면 인간은 엄청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래학자나 특이점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어떤 전문가들도 강한 AI를 바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송대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는 “로봇은 결코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며 “지능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의식의 계산불가성(NeuroQuantology)’이라는 논문을 통해 인간의 의식체계에는 컴퓨터로 계산될 수 없는 부분이 내포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② 뇌·인식에 대한 이해가 우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인 폴 앨런(Paul Allen)은 “커즈와일의 예상대로 2045년에 특이점이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간 뇌도 잘 모르고 완벽하게 해독해내지 못한 상황에서 강한 AI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앨런은 “인식이라는 개념은 커즈웨일, 버너 빈지가 생각하는 무어의 법칙처럼 꾸준히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AI 연구방식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앨런은 “인간의 뇌가 유아기에서 시작해 오랜 시간 성장기를 거치는 반면, AI는 처음부터 고도의 지능과 지식을 주입하고 있다”면서 “우선 지식을 습득하고 점차 일반적인 사고를 배우는 AI는 인간의 사고 성장과도는 정반대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로드니 브룩스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인공지능연구소 소장은 “알고리즘, 기호를 통한 논증과정보다 실제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더 어렵다”며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처럼 학습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상구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특이점을 주장하는 미래학자들은 돌 하나, 나무하나가 지식의 프로세스가 되어 지구는 물론 우주까지 하나가 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면서 “기계와 인간이 융합하는 미래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학자들의 공감을 표시하고 있지만, 특이점이 그리는 미래에 대해서는 이견이 크게 엇갈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