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 2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상호 관세'에 관한 행정 명령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의약품이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 대상에서 빠졌다. 한국·유럽 등 해외 제약·바이오 업계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원료의약품을 수입해 온 미국 대형 제약사들도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 관세 폭탄을 피하면서 불확실성이 해소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일(현지 시각)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모든 수입품에 기본 10% 관세를 부과하고, 약 60여 교역국에 징벌적 관세를 추가로 얹는 상호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산 수입품에는 25%의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는데, 의약품은 최종 관세 부과 대상 리스트에서 빠졌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생명과 직결되는 의약품에 관세를 부과하면 미국이 피해를 본다는 의견이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중심주의 정책 기조에 따라 미국 내 의약품 생산을 요구하는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자국 환자·기업 피해 부메랑 고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의약품에도 상호관세 25%를 적용할 가능성을 시사해 왔다. 그럼에도 의약품이 최종 부과 대상에서 빠진 데는 결국 자국민의 피해로 돌아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백악관은 이날 공식 발표문에서 “공중 보건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필수 의약품과 의료 물품은 관세 정책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 제약·바이오 기업과 환자단체들도 일제히 “관세가 의약품 부족 가능성을 높이고 환자의 의약품 접근성을 낮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바이오협회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발표를 앞두고 바이오 기업 10곳 중 9곳이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 의약품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수입 의약품에 관세를 부과하면 제조 비용이 급증해 의약품 가격이 오르고 환자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의약품은 오랫동안 무역전쟁에서 제외됐다.

존 크롤리 미국바이오협회 회장은 성명을 내고 “관세의 부정적인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며 “미 행정부, 의회와 협력해 미국 바이오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촉진하기 위한 민간 부문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인센티브 정책을 개발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로비 통했나…자국 생산 강화 기조 지속”

미국 대형 제약사들의 로비가 통했다는 말도 나온다. 지난 1일 로이터통신은 제약사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수입 의약품에 대한 단계적 관세(phased tariff)를 적용해 주도록 로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단계적 관세는 관세 부과로 인한 부담을 줄이고 미국으로 제조시설을 전환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으로 풀이됐다.

관세 대상에서 의약품이 빠졌지만, 업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중심주의에 따라 미국 내 생산을 유도하는 정책 기조가 계속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현재 미국 대형 제약사 다수가 유럽에서 원료의약품를 만들고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생산 기지를 미국으로 이전해 해외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일라이 릴리, 화이자, 머크(MSD) 등 미국의 주요 제약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해외 생산 기지를 미국으로 이전하라고 압박했다. 그는 “미국으로 수입되는 의약품에 최소 25%의 관세를 물리겠다”면서도 “미국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하면 관세가 없다”고 말했다.

이후 일라이 릴리, 존슨앤드존슨 등이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미국 내 생산시설 확대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기업들이 원료의약품 생산을 위해 미국 공장에 새로운 생산설비를 건설하는 데만 최소 2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기업 관세 불확실성 해소

의약품이 상호관세 대상에서 빠지면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한숨을 돌렸다. 의약품은 전체 매출에서 원재료 비중이 자동차, 철강 분야에 비해 크지 않아 관세를 매겨도 타격이 상대적으로 크지는 않을 것으로 분석됐다. 그럼에도 관세가 부과되면 주가가 하락하거나 수익 추정치가 낮아지는 등의 악영향이 예상됐다. 이런 이유로 국내 업체들은 관세 부과에 대비해 왔다.

미국 수출 비중이 큰 셀트리온(068270)은 올해 판매분에 대한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9개월분 원료 재고를 미국 현지로 이전했다. 관세 부담이 적은 원료의약품은 미국에 수출하고, 현지 업체를 통한 위탁생산을 확대하거나 현지 생산시설을 확보하는 계획도 세웠다. 미 관세 정책을 우려하는 주주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잇달아 단행하기도 했다.

SK바이오팜(326030)은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의 미국 내 매출이 지난해 매출의 80%에 달한다. 현재 국내에서 원료의약품을 제조한 뒤 캐나다에서 완제의약품으로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구조다. 하지만 관세 부과 시 필요한 시점에 즉각 현지생산에 돌입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삼성바이오에피스, 휴온스(243070)는 미국의 관세 정책 최종 발표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었다. 의약품이 관세 부과 대상에서 빠지거나 영향이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이미 해외에서 여러 위탁생산(CMO) 기업과 협력하고 있는 만큼, 관세 부과가 결정될 경우 빠른 전략 수정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휴온스는 “주요 수출 제품인 리도카인 주사제는 미국에서 품귀 현상을 겪는 기초의약품인 데다, 현지 생산업체도 한두 곳에 불과하다”며 “미국 시장의 리도카인 제품이 대부분 수입품이라 관세가 부과되더라도 경쟁사와 사정이 같다”고 했다.

한편,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발표한 국가별 관세율은 중국 34%, 유럽연합(EU) 20%, 베트남 46%, 대만 32%, 한국 25%, 일본 24% 등이다. 태국에는 36%, 스위스 31%, 인도네시아 32%, 인도 26%, 말레이시아 24%, 캄보디아 49%, 영국 10%, 남아프리카공화국 30% 등을 적용한다. 발효 시점은 10% 기본 관세가 5일, 국가별 관세가 9일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