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주의가 혁신을 대체했고, 사내 정치가 팀워크를 대신했다. 우리는 낙오했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의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CEO)는 자서전 ‘히트 리프레시’에서 2014년 2월 취임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빌 게이츠, 스티브 발머에 이어 MS의 세번째 CEO로 등판했던 나델라 앞에는 이권 다툼으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던 MS 직원들이 있었다.
당시 MS는 노키아 인수 실패, PC 판매 감소, 검색 사업 부진 등 총체적 난국 속에서 사업적으로나 조직문화 측면에서 ‘새로고침(refresh)’이 절실했다. 나델라 CEO는 ‘MS는 무엇을 위한 기업인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직원들에게 던졌고 마침내 2014년 7월 10일 전 직원에게 선언문과 같은 이메일을 보냈다.
“혁신의 속도를 높이려면 우리의 영혼, 즉 우리만의 독특한 가치를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MS는 모바일 퍼스트, 클라우드 퍼스트 세상을 위한 생산성 기업이자 플랫폼 기업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과 조직이 더욱 많이 활동하고 성과를 올리도록 힘을 안길 것입니다.”
나델라 CEO는 3년 동안 조직문화 쇄신에 노력을 쏟고, 직원들이 성장하는 사고를 몸소 실천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오늘날 MS는 엔비디아, 애플에 이어 시가총액 3조달러가 넘는 인공지능(AI) 시대의 선두 기업 중 한 곳으로 힘차게 질주하고 있다.
10년 전 MS의 상황은 2024년 위기를 이야기하는 삼성전자와 많이 닮았다. 지난해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은 14조원이 넘는 사상 최대의 적자를 냈고, 고대역폭메모리(HBM) 사업에선 SK하이닉스에 시장 주도권을 뺏겼다. 시스템LSI나 파운드리 사업은 앞날이 불투명하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전영현 부회장(DS부문장)을 구원투수로 투입하는 원포인트 인사를 단행했지만, 아직까지 반전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 부회장은 지난 8월 사내게시판에 “DS부문은 근원적 경쟁력 회복이라는 절박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며 “부서 및 구성원 간 소통의 벽이 생겨 공동의 목표를 위한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리더 간, 부서 간 소통을 강화해 벽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반도체 고유의 치열한 토론 문화를 재건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는 관료주의,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윗사람 한두 명의 판단이 크게 좌우하는 경직된 기업문화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삼성전자 DS부문 직원들은 지난해 최악의 반도체 불황에서 경영진의 뒤늦은 감산 결정으로 성과급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는 불신과 배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
닛케이 아시아는 지난 4월 삼성전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에서 엘리트 집단 삼성전자에서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으며, 임원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부하직원에게 단기 성과를 재촉한다고 했다. 반면 SK하이닉스의 기업문화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 채택하지 않으면 삼성과 경쟁할 수 없다면서 직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독려한다고 했다.
이제 삼성전자에 남겨진 숙제는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라는 타이틀 대신 AI 반도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빠르고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사업 역량과 새로운 조직문화 구축이다. 윤상직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달 한국경제인협회 주최 특별대담에 나와 “삼성의 위기는 생태계 부재에 있다. 앞으로 기술이 어느 방향으로 발전할지, 어떤 인력이 필요할지 알 수 없고 (삼성이) 혼자 다 할 수 없다”면서 “갑을문화, 원가절감 등과 같은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파란 피’가 흐르는 삼성전자 직원을 다시 뛰게 할 ‘리프레시’,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이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