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전지 소재 기업 천보(278280)가 높은 기업가치를 기반으로 배짱 있는 자금 조달에 성공했다. 기관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이례적으로 불리한 조건으로 대규모 전환사채(CB)를 발행을 추진했는데 다수의 투자자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CB 발행에 성공했다. 자회사 투자 계획을 내세워 주가 상승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 기관투자자들의 관심을 끈 것으로 해석된다.
2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천보는 지난 22일 기관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전환사채(CB) 2500억원, 신주인수권부사채(BW) 500억원의 발행자금을 납입받았다. 사채 발행대상자는 국내 자산운용사가 운용하는 펀드, 벤처캐피탈(VC)이 운용하는 펀드, 증권사 등이다.
천보는 2차전지 등의 소재를 생산하는 회사다. 중대형 리튬전지용 전해질인 F전해질(LiFSI)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면서 주목받았다. F전해질은 2차전지 4대 소재 중 하나인 전해액 첨가제 육불화인산리튬(LiPF6)을 대체하는 재료다.
이번에 조달된 자금은 F전해질을 생산하는 천보의 자회사 천보BLS에 투자할 예정이다. 최근 육불화인산리튬 가격이 급등하면서 대체재인 F전해질 사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천보는 이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다.
주목할 점은 전환사채 발행 조건이다. 전환사채 전환가액은 21일 종가(28만4000원) 대비 12% 높은 31만8150원으로 책정됐다. 천보 주가가 최소 31만8150원은 넘어야 전환사채 전환청구권을 행사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CB를 보유한 기관투자자는 주가가 31만8150원이 넘을 경우 1주당 31만8150원으로 CB를 주식으로 바꾼 후 이를 시장에 매도해 차익을 얻을 수 있다.
통상 전환사채 전환가액은 일정 기간 평균 주가를 산정해 낮은 가격 기준으로 10%가량 할인해 발행한다. 기존 주가보다 저렴하게 주식을 넘겨 채권자에게 이득을 주기 위해서다. 자금 조달이 급하거나 투자자 모집이 어려운 기업은 전환가액 할인율이 더욱 커지기도 한다.
반면 천보의 전환사채 발행 조건은 비싼 가격 기준으로 할증까지 붙었다. 공시에 따르면 1개월·1주일·최근일 가중산술평균주가를 산술평균한 가액과 청약일 전 3거래일 가중산술평균주가 중 높은 가액에서 10%를 할증한 금액을 전환가액으로 정했다.
보통 CB를 발행할 때 전환가액을 재조정(리픽싱)하는 조건도 이번 천보의 CB발행에서는 제시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CB를 발행할 때 CB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가가 CB발행 당시보다 하락하면 주가 수준에 맞춰 전환가액도 낮춰주는 리픽싱을 한다. CB투자자들이 전환권을 행사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다.
전환사채 표면이자율, 만기이자율이 모두 0%인 점도 이례적이다. 채권자가 사채를 보유한 것만으로는 이익이 없는 구조다. 전환청구권을 행사해 주식으로 바꿔 시장에 팔아야만 이득을 볼 수 있다.
풋옵션 행사조건도 천보에 유리한 조건으로 설정됐다. 풋옵션은 CB투자자(채권자)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주식전환권리 행사를 포기하고 채권 만기 이전에 원금과 이자를 되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일종의 조기상환청구권이다. 천보는 이번 CB발행에서 3년 후 풋옵션을 투자자에게 제공했지만 풋옵션을 행사할 때원금만 주는 조건을 걸었다. 보통은 원금에 일정 금리의 이자를 주는데 이자를 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간 시장금리를 반영하면 기관투자자가 풋옵션 행사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사실상 마이너스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이런 발행조건은 이례적이며, 기관투자자 입장에서는 주가가 오르는 게 유일한 이익 실현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증권가에서도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전혜영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천보는 2차전지 전해질 독과점 업체로 전방업계 증설 수혜, 외형 성장이 기대된다”며 “원재료 가격 상승을 판매가격에 전가하는 모습이 실적으로 확연히 나타나고 있어 2차전지 소재 업종 중 가장 높은 연평균 성장률이 예상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