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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에 전 세계 제약·바이오 산업계가 유례없는 협력에 나서고 있다. 경쟁자들과 힘을 합치고, 생산과 개발 영역에서의 협업은 물론, 일부 제약사는 특허권까지 내놓는 사례가 이어졌다. 정부와 산하 출연 연구소들도 협업 흐름에 올라타고 있다. 전 세계 약 5000만명을 감염시키고 월 평균 11만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가는 코로나19 위협 앞에 경쟁 속 협력이 인류 공존의 키워드로 떠오른 것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정부, 기업, 민간까지 분야를 불문한 협업으로 코로나19 백신 생산과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7월과 8월 각각 영국 제약업체 아스트라제네카 및 미국 노바백스와 코로나19 백신 후보의 항원 개발과 위탁개발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또 빌앤드멀린다게이츠 재단과 별도의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진행 중이며, 지난 3월에는 우리 정부로부터 코로나19 백신 개발 국책과제 업체로 선정됐다.

프랑스 사노피와 영국 GSK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힘을 합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협약서를 체결했다. 사노피는 DNA 재조합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코로나19 바이러스 표면에서 발견되는 단백질과 유전적으로 일치하는 'S-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GSK는 1회 도즈(1회 접종분)당 필요한 백신 단백질의 양을 줄여 더 많은 백신을 생산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화이자는 독일 바이오엔테크, 중국 푸싱약업 등과 함께 코로나19 백신 공동 개발을 추진 중이다. 화이자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5억달러를 투자하고, 생산 역량 확충을 위해 1억달러를 추가로 투입할 계획이다.

일러스트=정다운

미국 일라이릴리는 중국 상하이준스 바이오사이언스와 코로나19 치료용 항체 연구 협력 개발을 위한 파트너십을 맺었다. 일라이릴리는 중국 홍콩 등을 제외한 지역에 대한 개발, 생산 및 판매 독점권을 갖고 상하이준스는 중국 홍콩 지역의 라이선스를 갖는다.

미국 존슨앤존슨은 미 보건복지부 생명의학연구개발국(BARDA)과, 모더나는 미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와 공동으로 코로나19 백신을 개발 중이다. 모더나는 세계 최초로 코로나19 백신 후보 임상 1상 결과를 공개했다. 미국 법무부의 행보도 눈길을 끈다. 일라이릴리, 앱셀레라바이오로직스, 암젠, 아스트라제네카, 제넨텍, GSK 등 6개 회사가 코로나19 항체치료제 개발 정보 등을 공유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글로벌 혈액 제제 기업들은 '코로나19 혈장치료제 개발 얼라이언스(CoVIg-19 Plasma Alliance)'를 만들었다. 호주 씨에스엘베링, 일본 다케다, 영국 BPL, 프랑스 LFB, 스위스 옥타파마 등 글로벌 혈액 제제 기업들이 혈장 치료제 '고면역글로불린' 공동 개발에 나선다. 한국 GC녹십자도 여기에 합류했다. 특정 제품 개발을 위해 글로벌 혈액제제 기업들이 힘을 합치기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 기업들은 회복기 환자 혈장 확보와 임상시험, 제품 제조 등 치료제 주요 개발 단계에서 전문지식과 자원을 공유한다. GC녹십자 관계자는 "선두 기업들이 역량을 한데 모은 만큼 코로나19 혈장치료제 개발 기간과 공급체계 구축 기간 단축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제약사 애브비는 치료제 특허권을 포기하는 대담한 행보를 보였다. 이 회사는 코로나19 치료에 활용되는 에이즈 치료제 칼레트라의 특허권을 포기했다. 칼레트라는 길리어드사이언스의 렘데시비르(원래는 에볼라 치료제)와 함께 유력한 코로나19 치료제로 꼽혀왔다. 애브비는 2026년까지 행사 가능한 칼레트라에 대한 특허 일부를 공개하기로 했다. 특허권 포기로 복제약이 생산되면 전 세계에 더 많은 양의 치료제를 공급할 수 있게 된다.

다국적 제약사 노바티스의 계열사 산도스는 말라리아 치료제 하이드록시클로로퀸 1억3000만정을 세계에 무상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WHO(세계보건기구)의 임상 연구 논문 등에 따르면, 해당 치료제는 코로나19 치료에 효과가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산도스가 치료제를 무상 공급키로 한 것은 위기 속에 협업을 우선하는 제약업계의 최근 행보와 맥을 같이한다.

세계 각국 정부들은 코로나19 공동 대응을 위한 연합체도 발빠르게 출범시켰다. WHO를 중심으로 출범한세계백신면역연합(GAVI)과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는 공평한 코로나19 백신을 공급하기 위한 기구다. 이 기구는 내년 말까지 전 세계 인구 20%에 백신을 균등하게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 정부도 전체 국민 약 20%에 해당하는 1000만명이 맞을 수 있는 코로나19 백신을 공급받기로 하고 이 연합체에 백신 비용 850억원을 선입금했다.

세계 최대 민간 자선 재단인 빌앤드멀린다게이츠 재단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마이크로소프트(MS)를 창업한 빌게이츠 부부가 이끄는 이 재단은 코로나19를 정복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 개발을 뒷받침하고 있다. 게이츠재단과 한국 보건복지부, 생명과학기업이 공동 출자해 2018년 7월 설립한 라이트펀드는 KT, 제넥신, SK바이오사이언스 등 국내 기업에 코로나19 관련 투자를 단행했다.

이 같은 대규모 협업 덕분에 코로나19 백신 개발은 전례 없는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온라인 학술지 플로스원의 2013년 연구에 따르면, 후보 백신이 전(前)임상 시험 단계를 거쳐 시장에 출시하는 데걸리는 기간은 평균 10.7년이다.또 후보 백신 중 실제 백신으로 출시되는확률은 불과 6%에 불과하다.

화이자를 포함해 세계 제약업체가 내년 상반기 중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세계 백신 개발사의 최단 기록을 다시 쓴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처음 발병한 지 12~18개월 만이다. 현재까지 최단기간에 개발된 백신은 1967년 약 4년 만에 승인된 볼거리 백신이다.

실제 코로나19 백신 개발은 훨씬 빠르게 이뤄지는 중이다. 9일 발표된 임상 중간 결과이기는 하지만 화이자와 바이오엔테크가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은 90% 이상의 효과를 나타냈다. 화이자는 이달 미 식품의약국(FDA)에 긴급사용승인을 신청할 예정이다. 현 추세라면 내년 13억회 투여분이 생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