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회사 내에서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국민 눈높이와 사회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삼성 그룹이 창사 81년 만에 '무(無)노조 정책'을 포기했다. 삼성은 그동안 최고 복지와 임금을 통해 직원이 노조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정책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에버랜드와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 와해 작업 혐의로 전·현직 임직원이 잇따라 유죄 판결을 받자 노조 정책을 바꾼 것이다. 재계에선 국내에서 19만여명의 직원을 둔 최대 사업장인 삼성그룹이 자칫 양대 노총(민주노총·한국노총)의 세 불리기용 격전장이 되고 노조의 경영 간섭, 노사(勞使)·노노(勞勞)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삼성, 81년 만에 무노조 폐기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은 18일 공동 입장문을 내고 "앞으로는 임직원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이고, 건강한 노사 문화를 정립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삼성은 또 "노사 문제로 많은 분께 걱정과 실망을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하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4줄짜리 짧은 입장문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무노조'라는 오랜 공식을 깨겠다는 파격적인 발표"라고 말했다.

지난달 18일 경기도 화성시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앞에서 한국노총 산하 삼성전자 노조원이 노조 출범을 알리고 가입을 독려하고 있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1938년 '삼성상회'를 설립하면서 무노조 경영을 했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제품을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사는 사람이 모두 덕을 보는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원칙을 엄수함으로써 기업은 발전한다"고 썼다. 회사가 직원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줘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방식을 썼다. 잘못된 노조가 회사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삼성은 이를 노조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근로자 모두 '윈윈(win-win)'하는 경영 환경을 조성한다는 뜻에서 '비(非)노조 경영'이라 불렀다.

무노조 경영은 이건희 회장 때도 이어졌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 한 언론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삼성은 노조가 필요하지 않은 경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1년 복수 노조가 허용되자 삼성은 2012년부터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무노조 정책 표현을 뺐지만 내부적으로 바뀐 것이 없었다.

무노조 정책은 삼성그룹 성장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10대 그룹 중 대규모 노사 분규가 없던 곳은 삼성이 유일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0~2018년 한 해 평균 99.9건의 노사 분규가 발생했다. 삼성은 이러한 노사 분규에서 자유로웠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노조가 있었다면 반도체 선제 투자가 가능했겠느냐"며 "삼성이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된 데에는 무노조 정책이 상당 부분 기여했다"고 말했다.

◇우후죽순 노조 설립 이어지나

삼성이 무노조 기조를 폐기한 것은 법원의 유죄 판결뿐만 아니라 최근 계열사별로 노조 설립이 이어지는 데 따른 불가피한 선택으로 분석된다. 2011년 당시 에버랜드에 노조가 만들어졌고, 2013년엔 삼성전자서비스 노조가 설립됐다. 2014년엔 삼성SDI에 민주노총 산하 노조가 들어섰고, 2017년엔 삼성엔지니어링·삼성에스원에도 노조가 생겼다. 지난해 삼성전자에 3개의 개별 노조가 설립됐고, 올 11월 한국노총 금속노련 산하 삼성전자 노조가 출범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가입률은 20%가 안 되지만 확산 추세다. 재계에서는 내년 1~2월로 예상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선고도 영향을 줬다고 본다.

삼성이 무노조 원칙을 포기하면서 계열사별로 우후죽순처럼 노조 설립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에서는 포스코처럼 삼성 역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양대 노총의 격전장이 될까 우려한다. 지난해 무노조 경영을 포기한 포스코에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산하 2개 노조가 설립돼 노노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또 삼성의 주력인 반도체와 스마트폰 사업의 경우 대규모 선제 투자가 필수적인데 노조의 경영 간섭이 심해지면 미래 성장 가능성을 놓칠 위험도 있다. 파업이 잇따르면 해외 수주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강성 노조가 설립된다면 현대차 노조처럼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매년 사측과 지루한 연봉 협상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며 "한국 대표 기업까지 노조 리스크에 완전히 노출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