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최초로 도착한 서양인은 누구였을까? 서양문헌에 따르면 1577년 마카오를 떠나 일본으로 항해하다 조선에 표류한 포르투갈 사람 도밍고스 몬테이루 선장이다.
영국 역사가 찰스 복서는 ‘포르투갈 해양제국’이라는 책에서 포르투갈의 문헌에 의거해 그렇게 적고 있지만 아쉽게도 조선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의 공식 기록에 나타난 주인공은 누구인가? 1582년 1월 1일 중국의 요동 사람인 조원록 등과 함께 표류하다가 한반도에 발을 디딘 ‘마리이’(馬里伊)라는 남자다.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은 1653년인데 반해 그는 한반도에 첫발을 디뎠으니 하멜 일행보다 최소한 71년이나 앞서 조선땅을 밟은 것이다. 조선정부는 마리이를 비롯한 일행들을 중국으로 가는 사신 편에 함께 돌려보냈다고 ‘선조수정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마리이는 어느 나라사람이었을까? 확언할 수 없지만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 왔던 사람들이 주로 포르투갈 출신이었던 것으로 볼 때 포르투갈 이름 마링예이루(Marinheiro)에서 첫 두 음절을 따온 것이라는 설이 꽤 유력하게 들린다.
지난 회에 언급한 포르투갈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라는 책과 임진왜란 관련 사료를 통해서도 당시 포르투갈이 얼마나 빈번히 극동까지 왔는지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의병이 남긴 ‘난중잡록’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왔던 명나라 군인 가운데 포르투갈 흑인용병 4명이 참전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포르투갈의 임진왜란 참전 사실은 조선에 왔던 중국 사신의 전별을 그린 그림인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도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해귀(海鬼)’와 ‘원병삼백(猿兵三百)’이라고 쓴 깃발인데 이는 임진왜란에 포르투갈 군인과 여진족 출신으로 구성된 군인들도 참전했음을 의미한다. 1598년 명나라의 장군 팽신고가 선조에게 파랑국(波浪國) 군인들을 소개한 것도 조선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군이 4만7000여 명이었다. 해귀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다."
여기서 파랑국이란 포르투갈을 말하며, 흑인 용병을 가리켜 ‘해귀’라 표현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포르투갈은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쟁인 임진왜란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대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들이댄 최신무기가 조총이었다면, 이 조총 제조기술을 일본에 전해 준 것도 포르투갈 상인이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4년(선조 37년) 또 다른 포르투갈 사람이 조선 땅을 밟는다. 조선의 국경일지인 ‘등록유초’와 ‘연려실기록’, 그리고 ‘접왜사목초록’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완면제수(之緩面第愁)는 보동가류(寶東家流) 출신인데, 본국을 떠난 지 거의 15년이 됐다. 중국인들과 일본으로 무역을 하려고 가다가 왜적에게 약탈당한 뒤 함께 왜선을 탔다가 태풍을 만나 조선에 표착했다. 지완면제수가 거느리고 온 한 명은 흑체국인(黑體國人)인데, 이른바 해귀(海鬼)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완면제수’란 주앙 멘데스, 그리고 ‘보동가류’는 포르투갈을 말한다. 그리고 ‘흑체국인’이란 흑인을 말하고, ‘해귀’는 노예를 의미한다. 당시 멘데스의 나이는 34살이었고, 무역상이었다.
그는 중국 복건성 사람 16명과 일본인 남녀 32명, 흑인 1명과 함께 조선 수군에 생포된 뒤 4개월 동안 조선 땅에 억류됐다. 관례에 따라 그는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 편에 다른 중국인들과 함께 송환됐다.
현재 통영 산양읍 삼덕항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이유다. 지완면제수와 포르투갈 사람들이 죽음을 무릎 쓰고 유라시아 대륙의 정반대에 있는 동아시아까지 찾아온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상인정신이다. 요즘 말로 하면 남다른 비즈니스 열정이다.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1492년이었고,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반도를 침략한 것은 1592년이었다. 그 100년 사이의 1498년이란 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르투갈 사람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발견했던 시점이며, 아시아와 극동의 관점에서는 신대륙 발견보다 오히려 더 엄청난 역사의 변곡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신께서는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요람으로는 작은 땅을 주셨지만, 그들의 무덤으로는 전세계를 주셨다."
해양왕국 시절 포르투갈의 한 가톨릭 사제가 했다는 유명한 말처럼 15세기와 16세기의 포르투갈은 모험과 발견으로 흥분되는 시기였다.
인구가 불과 100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국가가 인도, 브라질, 말레이, 아프리카 등 전세계의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을 지배했다는 것도 불가사의하다. 식민지와 노예라는 어두운 측면도 있지만,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는 경이롭다.
포르투갈이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인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아니다. 국토도 협소하고 토양 조건이 나빴기 때문에 농업경제는 빈곤하기 일쑤였고 유럽 중심에서도 멀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륙이라는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만약 눈길을 해양으로 돌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포르투갈은 845 km의 긴 해안선을 갖고 있다. 거대한 바다로 향한다면 풍부한 어업자원과 해상 교역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 점에 착안한 리더가 있다. 역사책에서 ‘항해 왕자’라 부르는 엔리케 왕자(포르투갈에서는 ‘엔히크’라 발음)다. 세상 사람들이 오직 육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먼 바다에 주목했다.
요즘 경영학 용어로 말하면 피 튀기는 레드 오션 시장 대신 블루 오션을 택했다는 뜻이다. 역발상 전략이다.
1400년대 초중반 엔리케 왕자는 세계각지에서 우수한 조선기사, 항해기술자, 탐험가, 지리학자, 천문학자를 불러 모았다. 항해와 공학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기행문과 지리서적, 각국의 지도와 항해관련 서적을 모두 수집하였다. 일명 ‘사그레스(Sagres) 항해학교’라 불린다.
그를 이어 후대의 왕들의 후원으로 집중 연구개발한 덕에 포르투갈은 마침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안목 있는 리더의 개척정신과 당대 하이테크 기술력의 합작품이다.
리스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문장소는 벨렝(Belém) 지구다. 아름다운 제로니모스 수도원과 더불어 반드시 방문하게 되는 장소가 하나 있는데, 그곳이 항해시대의 개척자를 기리기 위한 ‘발견기념비’다.
그곳에 새겨진 여러 명의 위대한 이름 가운데 선두에 서있는 사람이 엔리케 왕자다. 그는 이 시대의 리더들에게 여전히 먼 바다를 가리키고 있다. 현대적 개념의 먼 바다란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미지의 분야다. 독창적인 새로운 시장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