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 왕자(1394년 3월 4일~1460년 11월 13일)의 이름 앞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동’이란 수식어를 붙여 ‘Infante Dom Henrique, o Navegador’라 부른다. ‘항해자, 동 엔리케 왕자’라는 뜻이다. 포르투갈어에서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 ‘동’(Dom)이란 수식어는 스페인어의 ‘돈’(Don)과 같이 귀족이나 위인을 기리는 칭호다.
근대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개척한 주역 엔리케 왕자는 주앙 1세의 셋째 아들로 포르투에서 태어났다. 항구도시 포르투에는 그를 기리는 공원과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는 이유다.
엔리케 왕자는 세 번 째 아들이었기에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었다. 대신 그는 평생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는 데 열정과 관심을 바쳤다. 대항해 시대를 개척한 최초의 주인공이다.
당시 유럽에서 그 항로가 중요했던 이유는 인도 혹은 아시아에서 생산되는 후추나 정향 같은 향신료들이 유럽에서 인기가 좋았고 큰 가격차이 때문에 무역으로서 큰 매력이 있었다.
15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열대지역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믿었고, 먼 바다에는 괴수가 살고 배가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다.
엔리케 왕자는 과학적 지식을 근거로 뱃사람들과 국민들을 설득하여 결국 1415년 지금의 모로코에 있는 세우타를 점령하고 1418년에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엔리케 왕자가 이룩한 가장 큰 공은 항해와 지도를 중심으로 괄목할만한 과학적인 발견과 지식탐구 정신 그리고 대항해 시대로 이끈 도전정신이다.
그는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발견하기 이전에 죽었지만 생전에 그가 후원하는 탐험대는 2천km에 이르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발견하고 답사하는 업적을 이뤘다.
엔리케 왕자와 후세의 왕들은 일명 ‘사그레스(Sagres) 항해학교’라 불리는 항해 연구소를 포르투갈 남서부에 세우고 기상학과 해양학, 지도 제작, 천문학을 집중 연구하였다.
덕분에 1500년대에 이르면 교역의 중심지가 지중해가 아니라 대서양으로 바뀌게 되고, 이탈리아의 많은 항구도시들을 제치고 리스본은 세계 최고의 교역중심지로 올라선다.
말라바르의 후추, 실론에 계피, 몰루카의 정향, 반다의 육두구, 중국과 일본에서 온 비단과 도자기가 리스본 항구에 가득 쌓이게 된다. 16세기 중반 리스본은 인구 10만 명을 넘고 그 가운데는 7천명의 외국인과 1만 명의 노예가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