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스탠퍼드대와 함께 ‘미국 양대 벤처 명문’이라 일컬어지는 MIT 슬론경영대학원의 빌 올렛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MIT 예비 창업자들의 요람인 ‘마틴 트러스트 창업가 정신 센터’ 소장을 겸임하고 있는 올렛 교수는 2011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창업가 워크숍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겪었던 흥미로운 일화를 내게 들려줬다.
행사장은 전 세계 창업가들로 붐볐지만 주최국인 한국의 창업가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유를 궁금해하는 올렛 교수에게 한 한국인 참석자가 창업해서 직원 여섯 명을 고용한 기업가 친구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친구가 여자 친구의 부모님께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가자 부모님은 “대기업 사원이나 공무원 같은 ‘진짜’ 직업을 구하면 그때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했단다. 올렛 교수는 한국이 벤처 창업하기 꺼리는 이유를 이런 위험을 기피하는 문화에서 찾았다.
“실패에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선 실패를 받아들이는 걸 특히 어려워하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실패가 없이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은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건 ‘여기에 너무나 먹음직스럽지만 칼로리는 0인 초콜릿 케이크가 있어’라는 말만큼이나 허황된 거죠.”
올렛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한국 기업에서 기존에 없던 획기적인 상품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 역시 바로 실패를 두려워하는 정서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발상이란 남들이 하지 않았던 방식을 취하고,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내가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과정이다. 기존에 남들이 하지 않았던 일을 최초로 시도할 때, 항상 실패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감수하지 않고 회피하려고만 든다면 언제까지고 남들이 해왔던 과정을 똑같이 따라 할 수밖에 없고, 진정한 역발상적 사고를 시도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기업들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때로는 실패는 상당한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기업의 존망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착각하듯 실패가 반드시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전 세계의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를 살펴보면 때로는 가장 큰 성공은 실패에서 나오곤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 실패에서 가장 큰 성공 일군 3M·리바이스
1968년 미국의 세계적 사무용품 기업 3M의 연구원 스펜서 실버는 강력 접착제를 만들려다 실패를 맛봤다. 실수로 접착제 원료를 잘못 배합한 탓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접착제는 일정 수준의 접착력은 유지했지만, 종이에 발라도 스며들지 않고 쉽게 벗겨져 버렸다. 통념상 접착제라는 것은 한 번 붙여 놓으면 단단하게 유지돼야 하는데, 그런 기능이 없는 이 접착제는 한마디로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대개의 연구자들은 실패한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지만, 실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런 실패도 언젠가는 쓰일 일이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사내 세미나에서 자신의 실패 사례를 밝혔다.
몇 년 뒤 이 회사의 아서 프라이 연구원이 교회 성가대에서 성가대원들이 불러야 할 노래 대목을 기억하기 위해 악보에 끼워 넣은 종잇조각이 자꾸만 바닥에 떨어져서 번거로워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실버의 실패 연구를 들은 적이 있는 프라이는 과거의 실패를 ‘떨어지지 않고 붙여 놓을 수 있는 책갈피’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1981년부터 판매되기 시작한 ‘포스트 잇(Post It)’이다. 포스트잇은 ‘스카치테이프’ 등과 함께 3M의 대표적인 상품이 됐고, AP통신이 20세기 최고 히트 상품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누구나 한두 벌쯤은 갖고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청바지 역시 최악의 실패에서 탄생한 산물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선 ‘골드 러시(gold rush)’ 열풍이 불었다. 미국 서부 지역엔 금광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려는 꿈을 품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을 전부 수용할 건물이 부족해 텐트가 주요 거주 수단으로 이용됐다.
천막용 천 제조업자였던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밀려드는 천막 천 제조 의뢰 덕택에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는 기쁨을 맛봤다. 어느 날 그는 대형 천막 10만개 납품 의뢰 주문을 받았고,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해 빚을 내 생산에 들어갔다. 3개월간 직원들과 꼬박 밤을 새가며 천막을 만들었지만, 이렇게 만든 제품이 의뢰인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의뢰자가 녹색 천막을 주문했지만 실수로 파란색 천막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납품 실패로 10만개의 파란색 천막은 고스란히 방치됐고, 공장 직원들에게 줄 임금은 밀려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트라우스는 ‘저 천막으로 질긴 바지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탄광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바지가 자주 찢어져 번거로워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최악의 실패에서 탄생한 청바지는 최고의 흥행 상품이 됐고, 스트라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리바이스’라는 브랜드명을 붙였다.
◆ 실패 축하하고 장려하는 혼다·슈퍼셀·구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그냥 말뿐인 구호가 아니란 것을 간파한 일부 기업은 직원들의 실패를 오히려 장려하거나, 실패를 축하하는 경우까지 있다.
일본 기업 혼다에는 다른 기업에 없는 독특한 상이 있다. ‘올해의 실패왕’이라는 상이다. 한 해 동안 가장 크게 실패한 연구원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상금은 우리 돈으로 약 1000만원 가까이 된다. 혼다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는 이러한 상을 통해 개발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도전하는 조직 문화를 조성하고자 했다.
‘클래시 오브 클랜(Clash of Clans)’ 등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게임으로 유명한 핀란드 게임 회사 수퍼셀(Supercell)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다. 이 회사에선 직원들이 특정 게임을 개발하거나 프로젝트에서 실패했을 때 샴페인 파티를 열어준다.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이 있으니 축하하고 기념하자는 의미에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 덕택에 누구나 편하게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고, 그 결과 2010년 창업한 이 회사는 6년 만에 세계적인 게임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런가 하면 기업 신용정보회사인 미국의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Dun & Bradstreet)에는 사내에 ‘실패의 벽’이라는 게 있다. 직원들이 자신이 했던 실수 가운데 가장 뼈아픈 실수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벽이다. 실패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다. ‘1. 실패한 순간을 자세히 기록하세요. 2.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를 쓰세요. 3. 자신의 이름을 적고 사인하세요.’
실패는 남들에게 드러내기보다 혼자서 꼭꼭 감추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성공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실수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창업자 제프 스티벨은 ‘이렇게 벽에다 자신의 실패담을 쓰면 직원들이 의기소침해지거나 유능한 동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감을 잃지 않고 실패에 한결 가벼운 마음을 갖게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실패의 벽을 도입했다.
구글이 운영하는 비밀 연구소 구글X의 수장(首將) 아스트로 텔러는 올해 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실패가 안전한 것이 되게끔 노력합니다. 실패의 증거가 나오자마자 팀은 아이디어를 폐기처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보상이 주어지니까요. 동료들은 실패에 대해 손뼉을 쳐 주고 저와 같은 매니저들로부터 축하의 포옹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는 진급도 하게 되죠.” 그는 “열렬한 회의론은 무한한 낙관론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완벽한 파트너다. 모든 아이디어의 잠재성을 끌어내 주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이면서 실패의 순기능을 강조했다.
‘순응형 모범생’을 선호하는 한국형 조직 문화와 실패한 뒤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가 계속 존재하는 한, 어쩌면 한국에서 참신한 역발상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패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지는 못할지라도 ‘실패가 끝’이라고 낙인찍는 관행이 서서히 사라진다면, 우리 기업에서도 더욱 창의적이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샘솟을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상당수가 보수적이고 엄격한 한국 기업에도 실패에 조금 더 관용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기를, 단기간 업적 내기에 연연하기보다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조금 더 유연한 조직을 만들게 되기를, 그리고 그 문화가 창의적 역발상의 밑거름이 되는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