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찰 담합 등 불공정 행위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깊이 반성합니다. 앞으로 준법 경영을 철저히 실천하고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내 대형 건설사 수장(首長)들이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숙였다.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건설 공사 입찰 담합 근절 및 경영 위기 극복 방안' 토론회에서 허명수 GS건설 부회장, 정수현 현대건설 사장, 박영식 대우건설 사장 등 대형 건설업체 대표와 임직원 등 150여명은 "연이은 입찰 담합 조사와 과징금, 손해배상 소송 등으로 건설사들이 생사(生死) 기로에 놓였다"며 수천억원대 과징금 부과 등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에 대해 선처를 요청했다.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건설업계 수장(首長)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숙이고 있다. 맨 앞은 한국건설경영협회 김세현 상근부회장, 뒷줄 왼쪽부터 윤영구 ㈜한양 사장, 이시구 계룡건설산업 회장, 이만영 한진중공업 사장, 이순병 동부건설 부회장, 허명수 한국건설경영협회 회장(GS건설 부회장), 정수현 현대건설 사장, 박영식 대우건설 사장, 김동수 대림산업 사장, 오병삼 두산건설 부사장, 윤창운 코오롱글로벌 사장, 장해남 경남기업 사장.

한국건설경영협회장인 허명수 GS건설 부회장은 인사말에서 "불법행위에 대해 상응하는 처분과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건설사가 불공정 관행에 가담한 본질적인 원인과 불가피한 요인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호소했다. 정수현 사장은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업계가 전반적으로 너무 어렵다. 자정 노력을 하고 있으니 중복해서 제재하는 것은 재고(再考)해 달라"고 말했다.

건설사, 최대 1조원 과징금 물 수도

건설사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개 사과에 나선 것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초유(初有)의 모습이다. 그만큼 건설업계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입찰 담합에 대한 정부의 제재가 2중(重)·3중으로 내려지면서 가뜩이나 실적 악화에 시달리는 건설사들이 빈사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대형 건설사들은 4대강 사업으로 이미 1000억원이 넘는 과징금을 내게 된 데 이어 올해 들어서는 인천도시철도 2호선, 대구지하철 공사, 경인운하까지 입찰 담합 판정을 받으며 3000억원이 넘는 과징금이 추가로 부과됐다. 여기에 공정위가 사업비 2조원대 호남고속철도 기초공사에 대해서도 22개 업체의 담합 혐의를 확인하고 조만간 약 3000억원의 과징금과 검찰 고발 조치 등을 내릴 예정이다.

건설업계의 담합에 대한 제재는 과징금 부과로 그치지 않는다. 담합 사실이 적발되면 최대 2년까지 모든 공공공사에 대한 입찰 참여가 금지되고 공사 발주기관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받게 된다.

건설사들은 해외 공사 수주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 지난 4월 노르웨이 오슬로 터널 건설 사업의 발주처는 입찰에 참여한 국내 건설사에 4대강 입찰 담합에 대한 해명 자료를 요구했다. 최상근 대한건설협회 계약제도실장은 "현재 조사 중인 사업장까지 더하면 건설사에 부과되는 과징금 규모가 1조원에 달할 것"이라며 "중국·일본 경쟁 업체는 국내 건설사의 담합 제재 사실을 비방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시 발주 등 제도 개선 마련돼야"

최근 대형 건설사 사이에는 공공공사 수주를 꺼리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발주처인 정부나 공공기관이 제시하는 공사비가 현실보다 크게 낮은 데다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등 추가적인 제재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대형 건설사의 참여가 줄면서 공공공사의 질(質)이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건설업계에서는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해 건설사에 대한 과징금 부과를 합리적인 선에서 마무리 짓고 최저가(最低價) 낙찰제와 공공 공사 동시 발주 등 제도적 문제점도 함께 개선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한 대형 건설사 국내영업 담당 임원은 "4대강 사업도 '국책사업에 대형 업체가 꼭 참여해야 한다'는 당시 해당 부처의 요구 때문에 수익성이 없는데도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며 "그런데 이제 와서 과징금을 내라니 말문이 막힌다"고 말했다. 신현윤 연세대 교수(법학)도 "건설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해외 수주에도 제약을 받을 수 있는 만큼 건설사에 대한 조사나 처분을 일시적으로 유예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