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기반의 글로벌 제약사 로슈는 중국 바이오 기업 이노벤트 바이오로직스의 소(小)세포 폐암 신약 후보 물질을 올 초 10억달러(약 1조4600억원)에 사들였다. 앞서 지난해 12월 머크는 중국 한소제약에서 20억달러(약 2조9200억원)를 주고 비만 신약 후보 물질을,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중국 듀얼리티 바이오로직스에서 신약 후보 물질을 10억달러에 도입했다. 이처럼 세계 10대 제약 바이오사가 5000만달러 넘는 선급금을 주고 사들인 신약 후보 물질 가운데 중국산 비율이 지난해 31%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10%였던 4년 전(2020년)의 3배 넘게 비율이 높아지면서 미국의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이에 미국 상원의 신흥 바이오테크 국가안보위원회(NSCEB)는 지난 8일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향후 3년간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바이오테크 분야에서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라며 “앞으로 5년간 최소 150억달러(약 21조원)를 투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美 위협하는 中 ‘수퍼 미투’ 신약
이번에 미국 상원 위원회는 중국의 바이오테크를 경계하면서 미국인들의 생체 정보를 중국이 입수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요구했다. 중국이 미국인 바이오 데이터를 분석해 미국인에게 특히 효능 있는 신약을 개발하면, 코로나 팬데믹 때 세계가 백신 개발 국가에 매달렸던 것처럼 미국의 바이오 주권이 중국에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중국은 20년간 바이오테크를 전략적 우선순위에 두면서 빠르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며 “신속히 대응하지 않으면 중국에 뒤처져 앞으로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은 세계 제약업계가 눈독 들이는 신약 후보 물질뿐 아니라 신약의 화학 구조를 일부만 변경해 새로 출시하는 이른바 ‘수퍼 미투(super-me-too) 신약’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통해 임상 시험 절차를 간소화하고, 많은 인구로 임상 시험을 빠르게 진행함으로써 신약 개발 기간을 대폭 단축해 경쟁력을 끌어올린 결과로 분석된다. 글로벌 제약 업계에선 “앞으로 10년 안에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할 신약의 상당수가 중국 실험실에서 나올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가 분야별 상위 10% 논문과 기관 경쟁력 등을 바탕으로 평가한 바이오 기술 연구 경쟁력 순위에서도 중국은 항생제, 유전체 염기 서열 분석, 합성생물학 등에서 미국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실제로 구현될 기술의 선행 지표여서 현 추세가 이어지면 중국의 미국 추월이 바이오 전 분야로 확대될 수도 있다.
◇빠른 임상과 원료의약품 경쟁력도
중국 바이오테크는 효능으로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예컨대 지난해 9월 임상 3상에서 세계 1위 면역 항암제인 머크의 ‘키트루다’보다 뛰어난 효능을 보인 미국의 항암제 ‘이보네시맙’은 중국 바이오 기업에서 사들인 후보 물질로 개발한 신약이다.
중국의 바이오테크가 이처럼 급성장한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지원 정책이 있다. 중국 정부는 2010년 바이오 산업을 ‘전략 신흥 산업’으로 정하고 세제 혜택을 주는 한편, 임상 시험 절차를 간소화하는 식의 규제 완화에 앞장섰다. 그 결과 2023년 중국의 임상 시험 등록 건수는 4300건 정도로 전년보다 26.1%나 증가했다. 최근 5년 동안 임상 시험 등록 건수의 연평균 증가율은 16%로 조사됐다. 일각에선 “인구가 많은 만큼 임상 참가자를 빨리 모을 수 있다는 점도 신약 개발 속도를 높인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 내 임상 시험 인프라도 개선, 증가 추세다. 2015년 375개에 불과했던 임상 시험 센터는 4년 만에 1000개 이상으로 늘었다.
중국은 완제 의약품을 만드는 데 필수인 원료의약품 시장도 장악하고 있다. 원료의약품은 최종 의약품의 효능을 좌우하는 핵심 성분으로 꼽힌다. 특히 항생제 부문의 원료의약품에서 중국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다. API의 반(半)제품 상태인 API 중간체 시장에서도 중국은 비중이 크다. 바이오 시장 분석 기관에 따르면 유럽에서 쓰이는 API 중간체의 70%는 중국산이다. 업계에서는 올해 중국의 원료의약품 매출이 159억7000만달러(약 22조7000억원)에 달하고, 2030년까지 연평균 7.86%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의 中 견제, 쉽지 않을 것”
중국의 바이오테크 발전에 가속이 붙자, 미국 정부는 최근 잇따라 견제책을 내놓고 있다. 다만 이 정책들이 실질적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미국 의회는 중국계 바이오테크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을 제한하는 ‘바이오 보안법’을 통과시켰지만, 상원 문턱을 넘지 못했다. 미 제약 업체와 중국 기업들 간 거래를 제한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번에 미 상원 신흥 바이오테크 국가안보위원회가 보고서로 바이오 집중 투자와 중국 견제를 권고한 가운데,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현지 매체들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보건과 연구 관련 예산을 잇따라 삭감하는 상황에서 바이오테크에 대한 투자액을 늘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