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 6종의 게놈(genome·유전체)에 담긴 유전 정보가 해독됐다. 침팬지와 보노보 같이 사람상과(上科)에 속하는 영장류인 유인원은 인간과 공동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먼 친척이다. 인간과 다른 유인원의 유전체를 비교하면 인간 유전자의 기능과 진화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에반 아이슐러(Evan Eichler) 미국 워싱턴대 의대 유전학과 교수와 애덤 필리피(Adam Phillippy) 미국립인간게놈연구소(NHGRI) 박사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진은 유인원 여섯 종의 완전한 게놈 염기서열 분석에 성공했다고 10일 밝혔다.
연구 결과는 이날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렸다. 논문에는 123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동안 워싱턴대 박사후연구원과 NHGRI 이아랑 박사가 제1, 2저자이다.
게놈은 유전물질인 DNA에 담긴 유전 정보 전체를 말한다. DNA는 4가지 종류의 염기들이 연결된 형태이다. 이 순서대로 단백질을 합성해 생명 현상을 관장한다. 게놈 지도는 이런 염기서열을 해독한 결과이다. 인간 게놈 지도는 유전체를 구성하는 30억쌍 염기서열을 모두 해독한 것이다. 2003년 처음 나왔고, 2022년 완성됐다.
이번 연구진은 모두 여섯 종의 유인원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 침팬지와 보노보, 고릴라, 보르네오 오랑우탄, 수마트라 오랑우탄, 큰긴팔원숭이(siamang) 등이다. 이번 연구는 유인원 게놈 지도를 인간 게놈 지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놈 지도가 완성되면서 유인원마다 서로 다른 유전적 차이도 새로 확인됐다. 예컨대 보노보의 경우 DNA가 있는 염색체의 중심부가 축소되면서 다른 유인원에는 없는 ‘미니 중심부’ 같은 형태가 관찰됐다. 염색체는 DNA 가닥들이 실패 역할을 하는 단백질에 감겨 있는 형태이다. 95%가 물이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염색은 잘 된다고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보르네오 오랑우탄은 수마트라 오랑우탄과 96만년 전에 갈라져 따로 진화했다. 인간이 침팬지와 공동 조상에서 500만년 전에 따로 진화했고, 보노보가 침팬지에서 250만년 전 분기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에 갈라진 셈이다. 그럼에도 보르네오 오랑우탄은 염색체의 약 5분의 1이 새로 생겨난 수준의 서열을 보여줬다.
과학자들은 게놈 지도를 통해 인간을 포함한 유인원의 진화 과정과 유전질환을 극복할 방법을 찾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먼 친척인 유인원들은 아직까지 게놈 해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하는 데 연구 역량이 집중되다 보니 유인원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했다.
유전체 분석 기업인 미국 일루미나의 루카스 쿠더나 연구원은 이날 네이처에 같이 실린 논평 논문에서 “인간과 다른 유인원의 유전체를 비교하는 건 인간의 진화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유인원 유전체는 크고 반복적인 서열을 포함하고 있어 정확하게 염기서열을 해독하고 재구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게놈 지도는 유인원 진화 연구를 크게 발전시킬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쿠더나 유인원은 “보노보나 보르네오 오랑우탄에서 보여지는 변화는 짧은 기간 동안 진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됐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유인원들의 일부 염색체는 중심부가 한쪽 끝에 가까운 형태인 것도 확인됐다. 중심부를 기준으로 염색체에 짧은 팔과 긴 팔이 있는 셈이다. 인간의 경우 염색체의 짧은 팔 부분에는 유전자가 거의 없다. 단백질을 합성하는 리보솜 관련 유전물질인 RNA 유전자만 있다.
리보솜 RNA가 있는 곳을 ‘핵 내 조직자 지역(NOR)’이라고 부르는데, 연구진은 이 NOR의 수가 유인원 종마다 다르다는 것도 확인했다. 예를 들어 큰긴팔원숭이는 1개인데, 오랑우탄은 10개였다. 연구진은 “유인원의 진화 과정에서 NOR의 위치가 변하고, 이를 재조합하면서 종 간 진화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특정 유인원 계통에 특이적인 복제 수 확장을 보이는 수백 개의 유전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복제는 유전자 발현을 조절해 유전자의 양을 변화시키는 기초적인 활동이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단백질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연구진은 복제 수 확장이 새로운 종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추정했다.
이번 게놈 지도도 한계를 갖고 있다. 유인원 6종 게놈에서 0.1~0.8%의 DNA 염기쌍은 정확하게 해독되지 않았다. 루카스 쿠더나 연구원은 “완전한 게놈 해독이라는 점에는 물음표가 붙지만, 염기서열의 해상도와 정확성을 크게 향상시킨 건 분명하다”며 “인간의 게놈 지도도 3년 전에야 비로소 완전한 품질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5),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5-08816-3
Nature(2025),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5-009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