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이 올해 과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로 꼽혔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13일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가 개발한 에이즈 주사제 ‘레나카파비르(lenacapavir)’를 ‘올해 최고의 과학 연구 성과(breakthrough of the year)’ 중 첫 번째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에이즈는 면역세포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질병이다. 면역체계가 손상되면서 각종 감염증과 악성 종양이 생기고 심하면 목숨도 잃는다. 에이즈 환자는 전 세계에서 약 4000만명에 이르고 국내에서도 1만 5000여명에 달한다.
◇증상 치료에서 100% 예방으로 발전
길리어드는 지난 2004년 에이즈 치료제로 알려진 ‘트루바다’를 개발하고 약 20년 넘게 치료제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 생명공학 기업이다. 에이즈는 아직 증상을 막는 항바이러스제가 있을 뿐 완치는 불가능하다. 약을 평생 먹어야 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발생하는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 우울증, 당뇨병 같은 부작용도 피할 수 없다.
길리어드가 개발한 레나카파비르는 죽음의 병으로 불리는 에이즈와의 전쟁에서 인류가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계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레나카파비르는 1년에 두 번 접종하는 것만으로 HIV를 거의 완전히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실제 임상시험에서 여성은 100% HIV를 예방했고, 남성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났다. 사이언스는 “레나카파비르는 한 번의 주사로 6개월 동안 보호 효과를 제공했고, 대륙 간 성별 그룹에서 99.9%의 보호 효과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예방 주사제가 백신과 거의 비슷한 효능을 보인 것이다.
레나카파비르는 바이러스의 유전물질을 보호하는 HIV 캡시드 단백질을 불능으로 만드는 식으로 바이러스 복제의 주요 단계를 차단한다. 레나카파비르는 처음에는 다른 약물에 저항성을 보이는 환자들을 위해 개발됐지만, 지금은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급부상했다. 유엔 에이즈계획(UNAIDS)의 위니 비아니마 사무총장은 “우리가 가진 어떤 예방 방법보다 우수한 수단을 찾았다”고 평가했다.
유엔에이즈계획(UNAIDS)과 길리어드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레나카파비르를 에이즈로 어려움을 겪는 국가들에 보급할 방법을 찾고 있다. 길리어드는 이미 HIV 감염률이 높은 국가에 저렴한 복제약 판매를 허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다만 남미 지역은 복제약 판매 허용 국가에서 제외돼 추가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사이언스는 “레나카파비르는 에이즈의 위험을 낮출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며 “전 세계적인 보급을 위해서는 경제성과 제조 계약, 보건 인프라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평가했다.
◇CAR-T세포 치료제, 우주망원경 성과도 포함
사이언스지는 힝에이즈 주사제와 함께 올해 혁신적인 연구 성과 9가지를 더 선정했다. 올해 10대 과학뉴스를 뽑은 것이다.
사이언스지는 면역세포치료제의 성과를 두 번째로 꼽았다. 면역반응이 과도해지면서 정상세포를 공격하면 루푸스나 다발성 경화증 같은 자가면역질환을 일으킨다. 올해 키메라 항원 수용체 T(CAR-T)세포 치료법은 자가면역질환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CAR-T세포 치료제는 환자의 백혈구에서 면역세포인 T세포를 분리한 혈액암을 일으키는 종양 B세포를 찾아 파괴하도록 유전자를 추가해 환자에게 돌려준다. 올해 독일 연구진은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NEJM)’에 다양한 자가면역질환 환자들에게 CAR-T세포 치료제를 투여해 성공을 거뒀다고 대해 보고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의 제임스웹우주망원경은 지난 2월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초기 우주의 밝은 은하를 발견했다. 이런 은하 중 일부는 은하수만큼 거대하는 추정이 나왔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은하 형성에 대한 이론을 뒤집는 결과다. 연구자들은 제임스웹우주망원경의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우주의 역사와 블랙홀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세우고 있다. 제임스웹우주망원경은 2022년 올해 최고의 연구 성과로 선정된 바 있다.
미국의 그린라이트 바이오사이언스(GreenLight Biosciences)는 RNA 간섭(RNAi)현상을 이용한 살충제를 개발했다. RNA는 DNA의 유전정보를 복사해 단백질을 만들지만, 그중 길이가 짧은 RNA는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 해충 애벌레가 농작물 잎을 씹으면 간섭RNA가 핵심 단백질의 발현을 차단해 며칠 내 죽는다.
첫 번째 RNA 살충제는 기존 화학물질 살충제에 내성을 갖고 있던 콜로라도감자벌레를 겨냥했다. 이 벌레는 전 세계적으로 연간 5억달러의 감자 수확 손실을 일으키는 해충이다. 그린라이트 바이오사이언스와 과학자들은 악명 높은 해충인 바로아진드기를 다음 타겟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 외에도 배추좀나방이나 열대거세미나방 같은 나비목 해충도 다음 타겟이다.
해조류의 세포에서 독특한 질소 고정 기관을 발견해 진화 연구에 새로운 길을 연 연구와 새로운 유형의 자성 발견, 복잡한 생명체의 특징 중 하나인 다세포성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발생했음을 시사하는 화석 발견, 업 전자와 다운 전자의 수가 같지만 독특한 물질 구조로 인해 강자성체의 특징인 시간반전대칭성이 깨진 알터마그넷(altermagnet), 대륙을 만드는 판구조론을 수장한 연구도 올해의 연구 성과로 뽑혔다.
미국 우주기업 스페이스X가 지난 10월 13일 우주선 스타십의 부스터를 공중에서 낚아 챈 성과도 올해의 10대 연구 성과에 이름을 올렸다. 음속보다 빠르게 하강하던 로켓 부스터는 일부 엔진을 재점화해 속도를 거의 제로에 가깝게 줄인 뒤, 7분 전에 자신이 떠난 발사 타워에 달린 집게발 모양의 로켓 팔에 안겼다. 사이언스는 “우주 과학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는 저비용 중형 로켓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스페이스X는 이미 부분 재사용이 가능한 팰컨9 로켓으로 궤도 투입 비용을 10분의 1로 줄였는데, 완전 재사용이 가능한 스타십은 이 비용을 다시 10분의 1로 낮출 것으로 기대된다. 사이언스는 많은 과학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환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스타십이 미 항공우주국(NASA)에 가져올 혁신만큼은 환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수천 년 전에 사망한 사람들의 가계도를 재구성해 고대 족보를 만든 연구도 10대 뉴스에 들어갔다. 고대 유전체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고대의 뼈와 치아에서 확보한 DNA로 인구의 이동과 감염병의 진화, 선사시대 식단에 대한 정보가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올해는 4만년 전에 유럽에서 살던 초기 현생인류의 두 여성이 수백㎞ 떨어진 곳에서 죽었지만, 가족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참고 자료
Science(2024),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v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