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글로벌 제약사에 신약 기술을 수출하고, 미국에서 신약 허가를 받는 등 사업 성과를 잇달아 내고 있다. 미국이 중국 기업의 미국 사업을 막는 ‘생물보안법’ 발의에 이어 고율의 관세까지 부과했지만, 중국이 연구개발(R&D) 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금융회사 스티펠(Stifel)이 올해 초 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제약사들의 라이선스(기술 도입) 계약 중 중국 기업과의 거래가 3분의 1을 차지했다.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이 차지하는 계약 비중은 2022년 12%, 2023년 29%, 2024년 31%로 3년 연속 증가했다. 중국이 글로벌 기업의 주요 시장에서 신약 개발 기지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비만약 선두주자에 차세대 후보물질 수출
미국 머크(MSD)는 중국 항서제약의 심혈관질환 치료 후보물질인 ‘HRS-5346(개발코드명)’에 대한 독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고 25일(현지 시각) 밝혔다. 계약 규모는 선급금 2억달러(약 2900억원)을 포함해 총 19억7000만달러(2조9000억원)에 달한다. 이번 계약으로 MSD는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국가에서 HRS-5346의 개발, 제조, 상업화에 대한 독점 권리를 확보했다.
HRS-5346은 혈관 벽에 쌓여 이는 지질단백질을 억제하는 신약 후보물질로 현재 임상 2상 시험 단계에 있다. 지질단백질이 쌓이면 혈류가 막혀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등 심혈관 질환을 유발한다. 항서제약은 1970년에 설립된 중국 제약사로, 중국에서 항암제 매출 1위 기업이다. 국내 기업 HLB(028300)와 간암 치료 신약을 공동 개발하는 회사이기도 하다. MSD 측은 “HRS-5346은 회사의 심장·대사 질환 파이프라인(신약 후보물질군)을 확장하고 보완해 줄 중요한 후보물질”이라고 밝혔다.
전날 덴마크 노보 노디스크도 중국 유나이티드 래버러토리스의 비만 치료제 후보물질 ‘UBT251′을 도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노보 노디스크는 이번 계약으로 중국, 홍콩, 마카오, 대만을 제외한 국가에서 UBT251의 개발·제조·상업화할 수 있는 독점권을 확보했다. 계약 규모는 선급금 2억달러(약 3000억원)을 포함해 최대 18억달러(약 2조6000억원)다.
노보 노디스크는 UBT251가 기존 비만 치료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비만약 열풍을 일으킨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을 모방해 뇌에서 식욕을 감소시키고 소화 속도를 늦춰 적은 식사로도 더 오래 포만감을 느끼도록 도와준다. UBT251은 GLP-1과 함께 인슐린 분비 자극 펩타이드(GIP), 글루카곤까지 모방한 삼중 펩타이드 작용제이다. GIP는 지방세포를 분해하고 글루카곤은 기초대사량 증가에 관여한다.
세계 시장에 출시된 삼중 작용제 비만 치료제는 아직 없다. 미국 일라이 릴리의 비만약인 마운자로는 GLP-1과 GIP를 동시에 겨냥하는 이중 작용제다. 업계는 삼중 작용제 개발에 먼저 성공하면 시장에서 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일라이 릴리, 한미약품도 삼중 작용제 비만 치료제 개발에 뛰어든 상황이다.
지난해에도 글로벌 제약사와 중국 기업 간 거래가 잇달았다. 작년 영국의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가 중국 CSPC제약그룹과 심혈관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한 19억2000만달러 규모의 계약을, MSD는 중국 한소제약과 먹는 비만 치료제 개발을 위해 20억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거대 인구 바탕으로 임상시험 비용, 시간 경쟁력
업계는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진 것은 세계 시장에서 연구·개발(R&D)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증거라고 평가한다. 최근에는 중국 기업들이 미국에서 신약 허가를 받는 사례로 나왔다.
지난 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중국 제약사 베이진의 면역항암제 ‘테빔브라(티슬리주맙)’를 HER2 양성 위암 1차 치료제로 승인했다. 암세포 표면에 HER2 단백질이 과다 발현된 위암 환자 치료제로 허가 받은 것은 MSD의 키트루다, BMS·오노의 옵디보에 이어 3번째다.
2023년에는 중국 준시바이오사이언스의 면역항암제 록토르지(토리팔리맙)을 비롯해 중국에서 개발된 신약 3개가 FDA 승인을 받았다. 연구기관 딜포마(DealForma)는 이런 추세라면 10년 후 미국 시장에 진입하는 신약 중 상당수가 중국에서 개발된 약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은 인구가 많아 임상시험 대상이 될 환자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만큼 임상시험 비용과 속도가 빨라 신약 개발에 유리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시장조사기관 에어피니티(Airfinity)에 따르면, 중국의 연구자 주도 임상시험(IIT) 건수가 2018년 2500건에서 2024년 8000건 이상으로 급증했다. 환자 풀이 크다보니 임상시험에 참여할 환자 모집도 용이해 임상연구 속도를 낼 수 있다.
임상시험이 증가하는 만큼 중국 내 혁신 신약 허가도 늘고 있다.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이 지난 18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1등급(First-in-Class) 혁신 신약 48종을 시판 허가했다. 이는 최근 5년간 가장 많은 허가 건수로, 2022년 21건, 2023년 40건에 이어 뚜렷한 증가세를 보였다.
네덜란드 벤처캐피털 포비온(Forbion)은 “중국 기업들이 R&D 생산성과 시간·비용에서 경쟁 우위를 지니고 있다”며 “특히 빠른 의사결정 구조와 효율적인 R&D 시스템이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