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월가와 국제금융계에서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며 실현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과 맞물려 그의 경제참모가 제시한 대외경제전략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재정·경상수지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달러 약세 유도 방안이 포함돼 있다.

◇ “100년물 美 국채 사라”… 달러 약세 유도하는 미국

14일 외신을 종합하면 뉴욕타임즈(NYT) 등은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달러 가치를 조정하는 다자간 협의인 ‘마러라고 합의’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러라고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플로리다 팜비치에 소유한 리조트로, 트럼프 당선 이후에는 각국의 귀빈이 방문하는 세계 정치의 허브로 기능하고 있다.

‘마러라고 합의’라는 개념은 스티븐 미란(Stephen Miran) 백악관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작년 11월 발표한 보고서 ‘세계 무역 시스템 재편을 위한 사용자 안내서(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에서 처음 등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에너지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한 날 석탄업계 종사자들 옆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란은 이 보고서에서 강(强)달러로 인해 발생한 미국의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동맹국들이 비용을 일정 부분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동맹국들이 보유한 10년 이하의 단기 미국 국채를 팔고 100년 만기의 초장기 국채를 매입하도록 유도할 것을 제안했다. 새로 발행될 초장기 국채는 이자율이 무이자에 가까워야 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이는 고금리 시절 발행한 국채의 이자 부담을 줄여 미국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 장기물 수요를 늘려 금리 상승 압력을 완화하고 미국 달러 강세를 억제하는 것도 주된 목표 중 하나다. 미란은 이를 통해 무역 균형이 회복되면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작아지면서 재정 건전성이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는 동맹국들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 관세와 안보를 외교적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과거 2018~2019년 중국과의 무역전쟁 당시 도입했던 고율 관세가 인플레이션 유발 없이 세수를 증가시켰다고 주장하며, 국가별 관세의 최적 수준을 20%로 제시했다.

시장에서는 마러라고 합의가 달러 약세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플라자 합의와 비슷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플라자 합의는 1985년 9월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이 참여한 환율조정 협정으로, 각국이 달러를 매각해 시장에 풀고 자국통화를 매수해 유통량을 줄이는 방식이었다. 이로 인해 엔화와 마르크화 가치는 2년 동안 약 50% 이상 절상됐고, 달러화 가치는 하락했다.

◇ “가능성 낮지만… 합의 실현시 韓 경제 타격”

트럼프 집권 초기에는 미란의 구상이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위적인 달러 절하는 글로벌 자금의 급격한 이동을 유발해 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실제로 고율 관세와 안보를 내세운 강경한 통상 압박을 추진하면서, 마러라고 합의 역시 단순한 이론을 넘어 트럼프식(式) 세계경제 전략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만약 이 합의가 현실화된다면 한국 경제에는 복합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원화 강세에 따른 수입물가 하락, 물가 안정, 금융시장 안정 효과가 기대된다. 중간재 수입 후 완제품을 수출하는 국내 제조업 특성상, 원화 강세는 생산비 절감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지난 6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은행 관계자가 달러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득(得)보다 실(失)이 더 클 것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마러라고 합의가 관세 정책과 병행 추진되는 과정에 한국 기업들은 미국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하도록 압박을 받을 수 있다. 이는 국내 일자리 감소와 수출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외환보유고의 구조가 미국 장기채 중심으로 재편돼 환율 급변 등 위기 상황에서 즉시 현금화 가능한 자산이 줄어들 수도 있다. 이는 외환시장 안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전망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합의의 현실화 가능성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박수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플라자 합의 당시에는 일본과 독일 등 주요 국가들이 강한 경제 체력을 바탕으로 협상에 임했지만, 현재는 미국 외에 경제 상황이 안정적인 국가가 많지 않다”면서 “마러라고 합의가 성사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반면, 세부적인 내용을 조정하면 현실화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김찬희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동맹국들이 미국의 관세 부담과 마러라고 합의 참여로 인한 비용을 비교해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며 “각국과의 협상을 거쳐 어느 정도 수정된 형태로라도 추진될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 불확실성 그리고 차곡차곡 추진되는 트럼프 2기의 재정수지 개선 관련 정책 추진 의지 등을 고려할 때 마러라고 합의를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로 치부하기 어렵다”면서 " 트럼프 대통령이 100년 무이자 국채 발행을 또 다른 협상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통화절상 압박 혹은 미국 국채 매입을 강력하게 유도하는 전략을 추진할 수 있음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