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투자공사(KIC)가 해외 기업을 인수·합병(M&A) 하려는 국내 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50억달러 규모(6조7500억원)의 위탁 자금을 마련해 뒀지만, 10년째 투자 실적이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KIC가 실제 투자 기업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유권해석 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정부가 이를 개선해 KIC가 해당 자금을 적극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기획재정부·KIC 등에 따르면, 2015년 조성된 50억달러 규모의 KIC 공동투자 위탁 자금은 10년째 집행된 적이 없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국부펀드인 KIC는 외환 보유액의 여유 자금을 굴리는 곳이다. 현행법상 100% 해외 투자로 자산을 운용하게 돼 있다. 정부는 2015년 국내 기업이 해외 기업을 M&A 하는 경우에도 KIC가 공동 투자할 수 있도록 ‘물꼬’를 튼 바 있다.
그런데 실상은 여태껏 한 번도 활용된 적이 없었다. 이런 문제를 의식해 기재부는 지난해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 해당 자금의 활용도를 높이겠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기재부는 “해외 첨단산업 기업의 M&A 시 국내 기업 해외 진출 공동투자 위탁 자금 50억달러를 우선 활용하겠다”고 했다. KIC 관계자는 “지난해 7월 정부가 정책을 발표한 이후 실제 여러 건의 투자를 검토했다”면서도 “다만 집행으로 이어진 건 아직 없다”고 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투자자금의 집행이 안 되는 이유로 ‘투자 대상의 모호함’을 꼽고 있다. 한국투자공사법에는 ‘위탁받은 자산을 외국에서 외화 표시 자산으로 운용’하도록 명시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엔 국내 투자가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돼 왔다.
문제는 가령 해외 자회사에서의 모든 이익이 국내에 있는 모회사에 귀속되는 구조라면 ‘국내 기업에 대한 투자’인지 ‘해외 기업에 대한 투자’인지에 대한 판단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M&A를 하게 되는 ‘해외 첨단산업 기업’에 대한 정의가 불명확하다는 문제도 있다. KIC는 안정적·장기적으로 좋은 수익률이 나는 동시에, 국가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조건을 동시 충족하는 ‘해외 기업 인수’ 사례여야 투자할 수 있는데, 실무선에서는 이를 판단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결국 투자 대상 기업인지에 대한 정부의 전향적인 판단과 추진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셈이다.
국내 기업에 의한 해외 기업 결합은 최근 느는 추세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3년 기업결합 심사 동향’에 따르면, 국내 기업에 의한 외국 기업 결합 건수(11→19건)와 금액(5000억→6조2000억원)은 모두 증가했다.
KIC 관계자는 “구조적 성장이 예상되는 신수종 산업과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전략 산업 등을 주요 투자 대상으로 현재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첨단 기술 기업 인수가 국가 산업 경쟁력 제고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해당 기술을 활용할 민간 기업의 전략적 참여, 즉 경영권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