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정책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잖아요. 그와 관련한 굵직한 의사결정을 일개 실무자가 했겠습니까?”

문재인 정부의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을 전면 부인한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대해 산업부의 한 관료는 이렇게 말했다. 백 전 장관은 이달 7일 열린 첫 공판에서 “국정과제의 조속한 실천을 위한 것이었다”며 원전 경제성 평가 부당 개입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월성 1호기 원전 경제성 평가 부당 개입 혐의로 기소된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6월 7일 공판 참석을 위해 대전시 서구 둔산동 대전지법으로 가고 있다. / 연합뉴스

백 전 장관은 월성 원전의 경제성 평가 결과를 조작하도록 직접 지시해 한국수력원자력에 손해를 입힌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업무방해)로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산업부는 2017년 12월 한수원에 월성 1호기 폐쇄 추진을 지시했고, 한수원은 폐쇄 심사에 소요되는 2년 동안은 원전을 계속 가동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문 전 대통령이 2018년 4월 월성 1호기 폐쇄 시점에 대해 묻자 산업부는 한수원에 즉시 가동 중단을 지시하고 ‘경제성 없음’을 뒷받침할 만한 평가 결과 조작을 유도했다.

15일 백 전 장관의 구속영장발부 심사가 열리는 가운데, 자신을 향한 혐의를 부인하는 백 전 장관에 대해 산업부 직원들은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산업부 간부는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고 과거에 함께 일했던 분(백 전 장관)에 관한 일이다 보니 현직 공무원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면서도 “부처 내 모든 의사결정의 최종 책임자께서 ‘난 아무 잘못이 없다’는 태도를 고집하면 잘못은 그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 있다는 의미인가”라고 했다.

또 다른 산업부 간부는 “새 정부가 막 출범해 평소보다 2배 열심히 일해도 모자란 상황인데, 전 정권 이슈로 발목을 잡히니 직원들 사기 저하는 말할 것도 없고 업무에도 상당한 차질이 발생한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검찰은 이번 건과 관련해 현직 산업부 간부인 박모 국장과 김모 국장을 수시로 불러 조사하고 있다. 백 전 장관의 지시를 받아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에 가담한 산업부 직원들은 검찰에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한 산업부 직원은 “지금 수사받는 분들 모두 지시에 따라 최선을 다한 사람들인데 그 결과가 이렇다”며 “(백 전 장관의 혐의 부인에) 황당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의 원전 관련 부서에서 관계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 시절 발생한 전력 대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과 백 전 장관을 비교하는 분위기도 있다. 2011년 9월 15일 터진 사상 최악의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은 사실 노무현 정부가 2006년 수립한 3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전력 수요 증가율을 2020년까지 연평균 1.8%씩 늘어날 것으로 보수적으로 내다본 게 원인이었다. 턱없이 낮게 전망한 전력 수요 증가율이 5년 후 전력 대란으로 돌아왔다는 게 에너지 전문가들의 평가다.

산업부 한 고위 관료는 “전력 대란의 책임을 지고 최 전 장관과 당시 에너지 라인 일부가 옷을 벗었는데, 최 전 장관은 떠나는 순간까지 ‘후배들에게 화살 돌리지 말아달라. 내 책임이다’라고 했다. 그 모습을 기억하기에 아직도 많은 산업부 직원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검찰은 원전 경제성 조작과 별개로 문 정부의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도 조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최근 한국중부발전·한국남동발전·한국서부발전 등 주요 산하 공공기관을 압수수색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산업부 1급 인사가 지연되는 배경에는 전 정부의 이런 인사 관련 잡음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산업부 1급은 대통령실 산업정책비서관으로 차출된 강경성 실장이 맡았던 에너지산업실장 자리만 공석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 정부 시절 발령받은 인물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업부의 한 사무관은 “고위직 인사가 언제 날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일을 얼마나 진행하고 또 어디까지 보고해야 할지 판단이 힘들다”며 “탈원전 정책의 후폭풍으로 많은 동료가 조직을 떠났는데, 이런 분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답답할 따름”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