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신임 총재는 “한국 경제가 대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면서 우리 경제가 코로나 이후 장기 저성장(secular stagnation)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한국은행이 거시경제 안정을 도모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은행이 물가·금융안정이라는 기본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정부의 정책 수립에 기여하고, 민간부문의 의사 결정에도 도움을 주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 경제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과감한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산업 정책을 세우면 민간이 밤새워 일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보고, 민간 주도의 질적 성장이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창용 총재는 21일 오후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의 1층 컨벤션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한국은행 총재로 이 자리에 서게 되어 개인적으로 무한한 영광이지만 제게 주어진 기대와 책무를 생각하면 어깨가 참으로 무겁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단기적으로 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예상보다 공격적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금리인상 행보,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인한 중국의 경기둔화 가능성 등이 통화정책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이 총재는 진단했다. 특히 올해의 경우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 압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경기 회복세는 기존 전망보다는 약화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성장과 물가 간 상충관계(trade-off)가 통화정책 운용을 더욱 제약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정교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정책을 운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 총재는 당장 눈 앞에 닥친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한국 경제가 중장기적으로도 여러 난관을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봤다. 그는 “보다 긴 안목에서 보면 지금 한국 경제는 대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며 “가속화되고 있는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과 더불어 세계화의 후퇴 흐름이 코로나 이후 뉴노멀(새로준 기준)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커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코로나 위기 이후 이런 뉴노멀 전환 과정의 도전을 이겨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지, 아니면 고령화와 생산성 저하 추세가 이어지면서 장기 저성장 국면으로 빠져들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다”고 경고했다.
이 총재는 이런 갈림길에서 우리 경제가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경제정책의 프레임(frame)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와 같이 정부가 산업 정책을 짜고 모두가 밤새워 일한다고 경제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며 “이제는 민간 주도로 보다 창의적이고 질적인 성장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소수의 산업과 국가로 집중된 수출과 공급망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고통이 수반되겠지만, 이를 감수하고 구조개혁을 통한 자원의 재배분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며 “과거 잘 달리던 경주마가 지쳐 예전 같지 않은데도 과거의 성공에 사로잡혀 새 말로 갈아타기를 주저하는 누를 범하면 안 된다”고 했다.
구조개혁 과정에서 나타날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 심화 문제에도 주목하고, 가계와 정부 부채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 총재는 “고령화로 복지 수요가 늘어날수록 경제 성장에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은 줄어들 것”이라며 “부채의 지속적인 확대가 자칫 거품 붕괴로 이어질 경우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기 때문에 거시경제 안정을 추구하는 한국은행이 부채 문제 연착륙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경제여건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역할도 커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우리 경제가 당면한 중장기적 도전을 생각해 보면 우리 책임이 통화정책의 테두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고 했다.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는 데 한국은행이 기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앞으로 한국은행이 3가지 울타리를 뛰어 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국은행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는 전문성 강화, 외부 소통 확대, 국제화를 꼽았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근무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어떤 이슈이든 그 분야의 전문가를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며 “한국은행 직원으로서 한국 경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각자 맡은 분야의 대표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중앙은행의 독립성 침해를 우려해 정부, 민간 등과의 소통에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총재는 “우리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논의한 연구 성과를 책상 서랍 안에만 넣어 두어서는 안 된다”며 “시대적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정부 시장, 민간 기관과 건설적 대화가 반드시 필요한 때”라고 했다. 그러면서 통화정책 방향은 포괄적(comprehensive)이고 일관적(consistent)이며 협력적(coordinated)이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국내 문제에 치우쳐 국제사회 변화의 큰 흐름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은행도 다른 중앙은행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경제와 녹색금융,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등의 현안에 관심을 갖고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조직 운영 개선 등에도 힘쓰겠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인사·조직 운영이나 급여 등에 있어서의 만족도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며 “예산이나 제도 등 여러 제약들로 인해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하나둘씩 근무 여건을 개선하고 사기를 진작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