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공약마다 충돌했던 기획재정부가 사실상 ‘백기(白旗)’를 들었다. 지역화폐 증액, 광역버스 준공영제 국비 부담 등 그간 이 후보가 기재부와 날선 공방을 벌여왔던 정책들이 대부분 예산안에 반영됐기 때문이다. 당초 6조원 발행규모였던 지역화폐는 30조원으로 늘었고, 경기도의 준공영제 버스 부담도 결국 국비 30%에서 50%로 상향됐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어렵다”며 그토록 반대하던 양도세 부과기준 상향과 가상자산 과세마저 국회의 뜻대로 결정됐다.

문제는 지난 3일 의결된 예산안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황에서 180석을 가진 거대 여당의 재정 지출 압박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7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조치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손실 보상을 위해 내년 초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을 검토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이 후보가 전날 ‘소상공인·자영업자 50조원 피해 보상’을 거론한 데 대한 후속 조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전 경기도지사·왼쪽)와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이 지난해 10월 1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2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에 참석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 나라가 기재부 나라냐” 이재명... 준공영제 국비·지역화폐 증액

8일 국회와 기재부 등에 따르면, 국회는 지난 3일 오전 본회의를 열어 정부안보다 3조3000억원이 증가한 607조7000억원 규모의 2022년도 예산안을 의결했다. 예산안에는 경기도가 요구한 내년 광역버스 준공영제 국비 지원 50%를 반영한 사업비(국비 364억원)가 포함됐다. 이로써 내년 광역버스 준공영제 총예산은 매칭(50%) 지방비 364억원을 포함해 총 728억원으로 확정됐다.

경기도 광역버스 준공영제 예산은 그간 이 후보와 기재부가 첨예한 갈등을 빚던 사업이다. 기재부는 지난 2019년 국토부와 경기도간 합의에 따라 경기도가 광역버스 국비지원 50% 지원을 요구하자 “다른 시도와 형평성에 어긋난다. 광역버스는 주로 수도권에만 있는 만큼 국고보조를 50% 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기재부는 올해 경기도 광역버스 국비를 전체예산의 30%(올해 예산 135억원 중 40억5000만원 지원)만 지원했다. 이에 이 후보는 경기도지사 시절인 작년 11월27일 확대간부회의에서 “광역버스 국가사무를 전제로 버스요금을 올린 건데 이제와서 예산부담을 못하겠다는 것은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라며 “공공기관끼리 합의했는데 이를 어기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것으로 심각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지난달 15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지역화폐·골목상권살리기 운동본부 농성 현장을 방문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이 후보가 대선후보가 되면서 분위기가 바꼈다. 민주당이 내년 정부 예산안을 심의하면서 광역버스 준공영제 국비지원비율을 30%(정부 예산안)에서 50%로 높인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후보의 공약이 예산에 반영된 것은 준공영제 버스 뿐만 아니라, 지역 화폐 등 여러 정책들도 무더기 통과됐다. 당초 정부는 국비 2400억원을 투입해 지역사랑상품권 6조원어치를 발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후보의 강력한 요청으로 국회 논의 과정에서 지역화폐 발행 규모가 15조원까지 확대됐다. 지방자치단체가 발행하는 지역화폐까지 포함하면 총 30조원 규모다.

그간 이 후보는 기재부가 지역화폐 예산을 대폭 삭감하자 “이 나라가 기재부 거냐”며 반발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을 향해선 “이러지 마시라”고 꼬집었다. 이 지사는 지난 9월 서울 마포구의 한 음식점에서 개최된 ‘을(乙) 권리보장’ 공약발표 기자회견에서 지역화폐 발행 확대 공약에 대해 발언하던 중 “홍 부총리께서 지역화폐 지원 예산을 77%나 삭감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 따듯한 안방에서 지내다보면 북풍한설이 부는 들판의 고통을 알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지난달 27일 전남 강진시에서 진행한 농업인들과의 간담회에서, 이 후보는 “(홍 부총리와 기재부)두드려 패는 것은 안 되고 맴매”라면서 “(대통령으로 뽑아줘서) 힘을 좀 주세요, 써보일테니까”라고 했다.

◇가상자산 유예·양도세 부과기준 상향도

가상자산 과세도 같은 맥락이다. 당초 정부는 지난해 발표한 세법 개정안에서 2021년 10월부터 가상자산 과세를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청년표심’ 잡기에 급급한 여야 정치권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1년 유예로 뒤집힌 셈이다. “시행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던 기획재정부는 거듭 반대입장을 표명했지만 결국 힘을 쓰지 못했다. 여기에 내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1년 정도 시행 시기를 늦출 경우, 아예 가상자산 과세가 없던 일로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픽=손민균

그간 홍 부총리는 “작년에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법도 통과시켜 주고 다 합의가 된 걸 1년 뒤에 와서 정부 보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된다”, “가상자산은 화폐·금융자산 아니다. 예정대로 과세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하지만 국회에서 가상자산 과세 1년 유예를 담은 세법개정안을 통과시키자, 그는 “법 개정 문제는 국회의 권한이기 때문에 여야가 이처럼 결정한다면 정부는 입법을 받아들이고 이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입장을 밝혔다.

양도세 부과 기준 상향도 기재부의 결국 백기로 끝났다. 여당이 양도세 부과 기준은 9억원에서 12억원으로 상향하는 세법개정을 추진하자, 기재부는 부동산 가격 자극을 우려하며 반대하는 입장을 내쳤다. 하지만 과거 양도세 비과세 기준선을 6억원에서 9억원으로 상향했던 2008년에도 6억~9억원 사이의 주택 거래가 많아지면서 해당 구간의 주택 가격이 뛰었다. 해당 구간의 ‘갈아타기’ 수요를 일으켜 집값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법안이 통과되면서 기재부의 입장이 머쓱해진 상황이다. 홍 부총리는 지난달 30일 “부동산 시장 (투자) 심리를 자극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면서도 “(1주택자 양도세) 부과 기준 조정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전날 기재위 조세)소위에서 전달했다”고 말했다.

◇ 잉크도 안 말랐는데, 벌써 추경 압박... 기재부 “해주고 욕먹는다”

더불어민주당이 코로나19 방역 조치에 따른 소상공인 손실 보상을 확대하기 위해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추진한다. 2022년도 본예산을 처리한 지 5일 만에 추경 논의를 재개한 것이다. 이재명 대선후보가 연일 손실 보상 확대를 주장하자 민주당도 이에 호응해 내년 대선 이전에 추가 지급을 마무리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박완주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 후보의 손실 보상 발언은) 추경을 하자는 것이다. 일상 회복을 위한 방역 단계가 수정된 탓에 손실 보상을 보완해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밝혔다. 여기에 민주당은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부과 기준 일시적 완화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최종적으로 “다음 정부에서 할일”이라며 철회했다. 하지만 결국 시장에는 차기 정부에서 부동산 규제가 완화될 수 있다는 시그널을 주게 됐다.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공무원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외부식당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재부 내부에서는 허탈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홍 부총리가 그간 소신을 밝혀왔지만, 번번이 이 후보와 여당의 요구대로 정책이 집행됐고, 더구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이 후보와 민주당의 비난의 대상으로 자리 잡혔기 때문이다.

기재부 한 관계자는 “정권 말인 상황에서 취임 1000일이 넘는 등 역대 최장수인 홍 부총리한테 사실상 무서울 게 없는 상황인데, 이번 세법개정 과정에서 소신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정치 권력의 입김에 기재부가 동의하고 협력한 상황으로 남게 됐다”며 “과거 경제부총리들은 정치권의 포퓰리즘을 막기 위해 사표 제출로 맞섰는데, (홍 부총리는)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 문제는 여당의 뜻대로 해주고도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홍 부총리가 대선을 앞두고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런 모습이 중립을 지키는 건지 공감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