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패키징 기술과 고대역폭메모리(HBM)가 반도체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왔지만, 업계에서는 차세대를 준비하기 위한 글로벌 반도체·부품 기업들의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HBM과 ‘칩 온 웨이퍼 온 서브스트레이트(CoWoS)’ 등의 첨단 패키징 기술이 발열, 전력소모, 비용 문제로 기술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엔비디아-TSMC 듀오가 지배하는 반도체 패러다임 이후를 준비하는 기업들이 차세대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삼성전자, 삼성전기 등을 비롯해 SKC, LG이노텍 등 부품 기업들이 유리기판 기술 개발을 진행 중이며 필옵틱스, 이오테크닉스, HB테크놀로지 등 장비 기업들도 유리기판 사업에 뛰어든 상황이다. 해외에선 인텔, AMD, 브로드컴 등이 유리기판 사업 로드맵을 세우고 개발 및 양산 작업에 돌입했다.
현재 세계 반도체 시장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인 엔비디아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가 인공지능(AI) 트렌드에 발맞춰 독주 체제를 구축한 상황이다. 다만 수요 대비 공급 부족 현상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으면서 AI 반도체 ‘버블’이 심화하고 있으며 기술적 한계도 드러나고 있다. HBM과 CoWoS의 등장으로 ‘무어의 법칙’을 한 차례 돌파했지만, HBM3E(5세대 HBM) 이후 발열과 전력소모 제어가 어려워지면서 투자 효율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유리기판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리기판은 기존의 실리콘이나 유기 기판이 아니라 얇고 단단한 유리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 기존 기판 대비 열 팽창률이 낮아 고열에서 휨 현상(Warpage)이 거의 없고, 같은 면적에서 최대 10배 많은 전기적 신호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전력 소모량도 기존 반도체 기판 대비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반도체 칩이 점점 더 작아지고 성능이 강력해지면서 생겨나는 문제점을 유리기판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김종민 삼성증권 수석연구원은 “유리기판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술 혁신이 가능하다면 엔비디아-TSMC 독주 체제를 뒤엎을 ‘언더독들의 반란’이 이뤄질 수 있다”며 “과거 스마트폰, 그래픽처리장치(GPU), HBM 등 신기술로 새로운 헤게모니를 차지한 언더독들이 1등 기업을 역전했던 사례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1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당초 업계 전망과 달리 기술 개발도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AMD의 경우 오는 2028년 첨단 반도체에 실리콘 인터포저를 대체해 유리기판 적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르면 내년부터 시제품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브로드컴은 이미 자사 반도체 칩에 유리기판을 도입하기 위한 성능 평가를 진행 중이다. 인텔은 유리기판 개발에 10억달러를 투자했으며 2030년 내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대형 반도체 회사, 소재부품, 장비사 등 다양한 기업들이 도전장을 던졌다. 삼성전자는 자체 공급망을 구축해 유리기판 시장에 진출할 예정이며, SKC는 자회사 앱솔릭스를 통해 유리기판을 직접 생산한다는 목표다. LG이노텍도 주요 소부장 기업과 협력해 생산 로드맵을 정했으며 삼성전기도 유리기판 생산 장비 구축 완료 후 직접 생산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외에도 필옵틱스는 TGV, ABF필름 부착, 싱귤레이션 장비를 제작하고 있으며 기가비스는 초미세 검사 장비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오테크닉스는 유리기판용 UV 드릴러를 이미 공급 중이며 HB테크놀로지는 후공정 리페어 장비를 바탕으로 유리기판용 장비 사업에 발을 담근 상황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설계, 생산업체뿐만 아니라 소재, 장비를 비롯한 전방위적 연구개발이 진행되면서 유리기판 생산의 타임라인이 빨라지고 있다”며 “인텔과 AMD를 시작으로 메모리 등에 유리기판 적용이 본격화될 경우 기존의 반도체 패키징, 미세공정 등 많은 분야에서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