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조류 충돌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피해가 너무 커서 조류 충돌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는 없다.”(로이터), “관계자들은 조류 충돌과 악천후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추정하지만 항공 전문가들은 이것이 치명적인 추락 사고를 일으키기에 충분한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BBC)
29일 오전 9시 3분쯤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7C2216편 여객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던 중 활주로 외벽에 충돌, 탑승자 181명 중 구조된 2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한 사고를 놓고 외신도 원인 추정에 들어갔다. 사고 원인으로 지목되는 ‘버드 스트라이크(조류 충돌)’, 랜딩기어(착륙장치) 오작동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외신이 인용한 전문가들은 ‘조류 충돌만으론 피해 규모가 너무 크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한국 정부가 섣부르게 조류 충돌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브리핑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로이터는 29일(현지 시각) “항공 전문가들은 한국 당국이 언급한 조류 충돌이 여객기 추락 사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며 “랜딩기어가 없는 듯한 모습, 사고 여객기가 양쪽 엔진을 갖췄다는 점에서 동체 착륙을 한 사건이 조류 충돌 때문이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고 전했다.
해외 전문가들은 조류 충돌만으로 이처럼 큰 인명 피해가 나긴 힘들었을 거라고 입을 모은다. 에어라인 뉴스 편집자인 제프리 토마스는 로이터에 “조류 충돌은 드문 일이 아니고 랜딩기어 문제도 드문 일이 아니다”라며 “일반적으로 조류 충돌로 인해 비행기가 손상되는 일은 없다”고 했다. 호주의 항공 안전 전문가 제프리 델은 “새 떼가 엔진에 빨려 들어가면 새 충돌로 인해 엔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엔진이 바로 꺼지지는 않아 조종사가 대응할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항공 전문가이자 이탈리아 공군 아카데미 교사 출신인 그레고리 알레지는 로이터에 “비행기가 왜 그렇게 빨리 착륙했는지, 플랩이 왜 열리지 않았는지, 랜딩기어는 왜 내려가지 않았는지 의문투성이”라고 지적했다. 비행 안전 전문가이자 루프트한자 조종사인 크리스티안 베케르트 역시 로이터에 “영상을 보면 역추진 장치를 제외한 여객기의 브레이크 시스템 대부분이 작동하지 않아 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랜딩기어가 아직 올라가 있는 동안 조류 충돌이 발생했을 때 랜딩기어가 손상될 가능성은 낮고, 랜딩기어가 내려간 상태에서 조류 충돌이 발생했다면 다시 (랜딩기어를) 올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랜딩기어를 내리지 않는 것은 정말 드물고 이례적”이라며 “대체 시스템을 이용해 랜딩기어를 내릴 수 있는 독립적인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 당국이 조류 충돌을 사고 원인으로 추정한 발언을 내놓은 것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이정현 무안소방서장은 “조류 충돌이나 악천후로 인한 사고로 추정된다”고 브리핑한 바 있다. 하지만 사고 당시 하늘은 맑은 상태였다. 전 연방 항공청 안전 검사관인 데이비드 수시는 CNN은 “추측은 조사관의 최악의 적”이라며 “항공기 사고 조사가 있을 때 정보가 보호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 추측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항공 산업 컨설턴트 스콧 해밀턴은 수시의 우려에 공감하며 한국 당국에 이 단계에서 “선언적 성명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CNN은 “전문가들은 랜딩기어가 착륙 전에 완전히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는데, 아직 원인은 불분명하다”며 “항공 분석가들은 추락 원인을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다.
◇ “사고 기종, 전 세계 운항 여객기의 15%…랜딩기어 설계 잘 돼”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사고 여객기는 유럽 항공사 라이언에어가 최초로 운항한 뒤 2017년 민항기 리스업체인 SMBC 에비에이션캐피털에서 제주항공에 임대한 보잉 737-800 모델이다. 전 세계에서 운항하고 있는 737-800 모델의 기령(비행기 사용 연수)은 5년에서 27년 이상이다. 사고 여객기는 기령이 15년으로 파악된다. NYT는 “전 세계에서 운항 중인 여객기는 약 2만8000여대로 이 중 15%인 4400대가 보잉 737-800기종”이라며 “보잉은 1998년 이후 이 기종을 약 5000대 인도했다”고 전했다. 한국에서는 제주항공, 티웨이항공, 진에어, 이스타항공, 대한항공이 보잉 737-800기종을 쓴다.
해외 항공업계에선 사고 기종인 보잉 737-800의 랜딩기어가 매우 잘 설계됐기에 이번 사고가 이례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제프리 토마스 에어라인뉴스 편집자는 BBC에 “한국과 한국 항공사는 업계 모범사례로 여겨지고 있다”며 “항공기와 항공사 모두 뛰어난 안전 기록을 갖고 있기에 이번 비극에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다만 일각에선 유지관리가 부실할 경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보잉 737 시리즈의 안전 역사를 연구한 서던캘리포니아대 공학 교수인 나즈메딘 메시카티는 NYT에 “문제의 비행기는 매우 안전하고 좋은 안전 기록을 갖고 있다”면서도 “정비는 실제 항공 사고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했다.
한편, 세계 항공규정에 따르면 한국이 조사를 주도하고 사고기가 제작된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가 조사에 참석한다. 전문가들은 항공사고가 보통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만큼, 사건 원인 조사까지 최소 몇 달이 걸릴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