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부텐(PB·Polybutene)은 국내 화학회사가 세계 시장을 제패한 몇 안 되는 스페셜티(specialty·고부가가치) 제품입니다. 규모가 큰 경쟁사들이 선점한 제품군 대신 이들이 접근하지 않은 품목으로 일찌감치 눈을 돌리고 30년 넘게 한 우물을 판 결과 불황을 견딜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전남 여수시 화치동에 위치한 DL케미칼 여수공장. 조정복 DL케미칼 여수공장장은 지속적인 투자로 PB 제품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2위와의 격차를 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DL케미칼은 지난해 기준 글로벌 PB 시장에서 25%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국내 석유화학 회사가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화학 제품인 폴리에틸렌(PE·Polyethylene)은 흰색의 작은 쌀알처럼 생겼지만, DL케미칼의 주력 품목인 PB는 무색무취의 액체 형태로 만들어진다. 조 공장장은 “PB는 다른 화학 제품에 비해 제조 공정이 단순하고 생산 효율성은 높다. 제품에 염소 성분이 없어 제조 과정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적은 점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PB는 주로 윤활유 첨가제와 연료 청정제 등의 원료로 쓰이는 석유화학 제품이다. 원유를 증류해 추출한 나프타는 분해 공정을 거쳐 탄소 연결고리의 수에 따라 C2(에틸렌)와 C3(프로필렌), C4(부타디엔), C5 등으로 생산된다. DL케미칼은 혼합된 C4를 활용해 생성한 ‘C4 라피네이트-1(C4 R-1)’를 만든다. PB는 C4 R-1의 중합체로 구성된 액상 고분자 추출물로 ▲높은 점도 ▲우수한 화학적 안정성 ▲낮은 휘발성 ▲높은 전기 절연성 등의 장점을 가져 여러 산업 분야에서 활용된다.
PB는 분자량에 따라 다양한 물리적 성질을 가져 쓰임새가 많다. 분자량이 적은 PB는 점성이 낮아 윤활제와 화장품 등에 사용된다. 분자량이 많은 PB는 높은 점성이 필요한 접착제나 실란트(자재의 틈이나 이음매, 접합부 등을 메우거나 고정시키는 액상 재료) 등을 만드는데 쓰인다.
DL케미칼이 PB 생산에 뛰어든 것은 30여년 전부터다. 1975년에 설립된 호남에틸렌을 인수한 대림산업은 1992년 대덕연구소를 설립하고 같은 해 국내 최초로 범용 PB를 개발했다. 이후 2010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고반응성 PB를 개발해 2015년부터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현재 여수에 위치한 2곳의 PB 공장의 연간 생산량은 22만톤(t)에 이른다.
DL케미칼이 개발에 뛰어들 당시 PB는 다른 대형 석유화학 회사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사업 분야였다. 폴리에틸렌 등 일반적인 화학 제품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수요가 많고, 수익성도 높아 굳이 시장이 작은 PB에 투자를 할 이유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회사 규모가 작았던 DL케미칼은 범용 화학 제품 분야에서 대형사들과 경쟁하기가 벅차 당시 틈새 시장이었던 PB로 눈을 돌렸다.
오랜 기간 PB에 집중한 결과 DL케미칼은 개발과 생산 등에서 노하우를 쌓으며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인정 받고 있다. PB 제품 안에서도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꼽히는 고반응성 PB 생산 기술은 전세계에서 DL케미칼과 독일 바스프, 미국 TPC 등 3곳만 보유 중이다. DL케미칼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단일 공장에서 범용 PB와 고반응성 PB를 모두 생산할 수 있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현재는 PB 제품의 기술 수준이 고도화돼 다른 석유화학 기업들이 개발에 뛰어들어도 DL케미칼과의 기술 격차를 쉽게 좁히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PB 제품 개발과 생산에 30년 넘게 집중한 DL케미칼의 전략은 최근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국내 석유화학 시장에서 빛을 보고 있다. 2020년대 초까지 빠른 성장세를 보였던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중국이 2010년대 후반부터 공장을 대규모로 증설해 물량을 쏟아내면서 위기를 맞았다. 국내 업체들은 에틸렌 등 기초화학 제품을 주로 생산해 왔는데, 중국이 기술력을 확보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이다.
최근 불황 속에서도 실적 방어에 성공한 화학회사들은 독보적인 기술력이 필요한 스페셜티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다. DL케미칼이 시장을 석권한 PB 역시 아직 중국이 따라잡지 못한 스페셜티 품목 중 하나로 꼽힌다. DL케미칼의 지난해 3분기 연결 기준 매출액은 1조231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1.9% 증가했고, 영업이익도 477억원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DL케미칼은 PB 분야에서 확보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생산 품목을 자동차 및 건설용 접착제, 전자재료 포팅(전자기기 보호를 위해 액체 화학 제품으로 기판을 덮는 공정)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DL케미칼 관계자는 “PB 제품에 대한 시장의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불황 속에서도 지속적인 성장 발판을 만들고 있다”며 “업황과 관계 없이 꾸준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스페셜티 전략을 계속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