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분리막 제조 기업들이 유럽 내 증설을 통해 생산능력(CAPA·Capacity)을 대폭 늘리는 가운데, 북미 진출에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방 수요 둔화로 기존 공장 가동률이 낮아졌고 신규 공장의 가동 시점도 미루는 상황에서 투자에 대한 부담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에게 지급되는 전기차 보조금 폐지를 예고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도 투자 판단에 대한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SK아이이테크놀로지(361610)(SKIET)는 올해 중순부터 연산 3억4000만㎡ 규모의 폴란드 제2공장을 가동하고, 올해 말까지 총 8억6000만㎡ 규모의 3·4공장 증설도 마무리할 계획이다. SKIET는 현재 충북 청주(5억2000만㎡ 규모)와 중국 장쑤성 창저우(6억8000만㎡ 규모)에 공장을 가지고 있고, 폴란드에서는 3억4000만㎡ 규모의 1공장만 가동 중이다. 현재 15억4000만㎡ 규모인 CAPA는 내년부터 27만4000㎡로 약 78% 늘어난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 폴란드 공장 전경. / SKIET 제공

더블유씨피(393890)(WCP)도 내년까지 12억4000㎡ 규모의 헝가리 공장 증설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WCP는 한국 충주에 8억2000만㎡ 규모의 공장을 운영 중인데, 이곳에도 3억1000만㎡ 규모의 증설을 추진 중이다. 계획된 국내외 증설이 모두 마무리되면 생산능력은 23만7000㎡로 2배 가까이 확대된다.

국내 분리막 업계는 지난해 미국 대선 이후 북미 진출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전방 산업인 전기차·배터리 수요 침체로 업황이 악화하며 적자를 내는 상황에서 신규 투자에 대한 부담이 커지고 있다.

SKIET는 지난해 1~3분기 누적 2000억원 규모의 영업손실을 냈고, 3분기에는 주요 공장 가동률이 20~30%까지 낮아졌다. WCP는 앞서 증설 중인 한국 청주 7라인 가동 시점을 올해 2분기, 유럽 헝가리 공장 가동 시점을 2026년 1분기로 계획했으나 업황이 악화해 각각 2026년 1분기, 2027년 1분기로 미룬 상태다.

더블유씨피의 분리막 제조 공정. /더블유씨피 제공

미국 내 정책 불확실성도 투자를 주저하게 하는 원인이다. 현행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라 미국에서 전기차 소비자가 최대 7500달러(약 1100만원)의 구매 보조금을 받으려면 구매하는 전기차에 탑재된 배터리 부품이 일정 비율 이상 미국에서 제조돼야 한다. 분리막 공정은 크게 폴리에틸렌(PE) 등 소재를 원단으로 성형(成形)하는 제막 공정과 원단을 코팅하는 코팅 공정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코팅 공정만 북미에 갖춰도 IRA상 보조금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는 20일 출범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전기차 소비자 보조금과 관련된 IRA 30D 조항의 수정 또는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이 경우 거액을 들여 북미 지역에 새 공장을 짓는 의미가 퇴색된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2차전지 분리막 시장은 2035년 599억㎡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상됐으나 업계는 995억㎡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 SNE리서치는 “글로벌 분리막 1위 제조 업체인 창신신소재(SEMCORP)를 비롯한 중국 제조사들이 공격적인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나중에 과잉 공급 문제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