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문연 경기도 의왕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타임빌라스’. 롯데가 2년 반 만에 새롭게 선보인 이 쇼핑몰의 대표 공간은 글라스 빌(glass ville)이다. 쇼핑몰 외부 잔디광장으로 나오면 2000평 규모의 야외 공간이 펼쳐지는데, 여기에 이국적인 유리 건축물 10개가 듬성듬성 설치돼 있다.

글라스 빌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계절과 시간의 변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뒤에 있는 바라산과 현대적인 건축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이 공간은 롯데쇼핑(023530)이 기존과 다른 차세대 쇼핑몰을 제안했다는 평가를 받는 데 일조했다.

개관 전인 3일 방문한 롯데프리미엄아울렛 타임빌라스 내부에 있는 글라스 빌 모습. / 이현승 기자

글라스 빌은 공간 기획·건설팅 스타트업 글로우서울의 작품이다. 글로우서울은 2019년 낙후된 구도심이었던 익선동 좁은 골목에 디저트 카페 청수당, 일식당 송암여관, 샤부샤부 식당 온천집 등 자체 기획 브랜드를 입점시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인증샷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성지로 만들었다.

공간 전문가인 유정수 글로우서울 대표는 21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소비자들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아닌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를 추구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물건을 얼마나 싸게 살 수 있는지가 아니라 내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보낼 수 있는지를 따진다는 것이다.

팬덤을 만드는 공간은 소비자의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곳이라고 유 대표는 강조했다. 시각과 미각 뿐 아니라 후각, 청각, 촉각까지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은 디지털 혁신이 아무리 가속화 돼도 온라인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이됐다는 것이다.

모바일로도 간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여전히 값비싼 돈을 내고 극장을 찾거나 직접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이 존재하는 것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한다.

그는 소비자들이 오래 머물고 싶어하는 공간을 기획하는 일을 공연에 비유했다. 유 대표는 “체류시간을 고려하면 카페는 60분, 쇼핑몰은 90분짜리 뮤지컬을 보고 가는 셈”이라며 “뮤지컬을 만들 때 중간 30분은 대충 때우자고 기획하는 곳은 없지 않나. 기승전결이 만족스러워야 좋은 공연이 된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글로우서울 사무실에서 유정수 대표. / 이현승 기자

글로우서울은 국내 유통 대기업들과 협업하고 있다. 이들의 고민은 무엇인가.

“고객의 시간을 어떻게 붙잡아둘 것인가가 가장 중요해졌다. 예전에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가 더 중요한 시대가 왔다. 예전 사람들은 ‘내가 10만원을 가지고 뭘 할까’를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 황금 같은 주말을 어떻게 쓸까’를 고민한다.

대형마트가 인기 없어진 이유는 고객의 시간을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트에 방문해 쇼핑하고 오면 반나절이 사라지는데, 똑같은 활동을 쿠팡에서 한 시간 만에 할 수 있다. 시간 대비 성능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시성비는 이마트가 물건을 좀 더 싸게 판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코로나가 변곡점이 됐을까.

“지난해 개장한 현대백화점의 더현대서울, 롯데의 타임빌라스 모두 코로나 이전에 설계 됐다. 코로나와 관계없이 유통시장에서 오프라인 업체들의 입지가 줄어들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전까지 국내 유통사들은 치열한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백화점을 크게 만들어두면 소비자들이 알아서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기업의 생존 위기와 관련된 문제가 됐기 때문에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한국은 온라인 침투율이 전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어서 오프라인의 위기가 가장 심각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문제는 벤치마킹 할 해외 사례가 없다. 퍼스트 팔로워(first follower)가 아니라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야 한다. 여기서 다들 꽉 막혀 있다. 그래서 예전이었으면 검토도 안했을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제안해도 해보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전보다 사람들이 공간에 더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먹고사니즘(먹고사는 것에 이념을 뜻하는 -ism을 붙여 만든 말)이 다 해결되지 않았나. 의식주 중에서 의(衣), 식(食)은 높은 수준에 올라왔는데 주거 공간의 경우 사람들의 기대치보다 발전을 못했다. 일반 소비재는 점점 더 비용이 적게드는 국가로 생산거점을 이동시키면서 품질 대비 가격을 낮추는게 가능했다.

반면 부동산은 자산이라는 게 문제다. 공산품 가격이 내려가는 동안 부동산 가격은 올랐고 소득 대비 개인이 지불할 수 있는 건축비는 줄었다. "

지금의 소비자들은 어떤 공간에 반응하나.

“시각 뿐 아니라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외장재나 내장재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정도를 넘어서 나무를 심고 폭포가 떨어지게 만드는 순간 방문한 사람들의 시각, 후각, 촉각, 청각을 모두 자극할 수 있다.

사람들이 여전히 오프라인 공간에 가는 이유는 온라인에서 할 수 없는 경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래형 메타버스(3차원 가상 세계)를 통해 몰디브에 가는 것과 실제로 몰디브에 가는 것은 다르다. 실제 몰디브에 가면 오감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인테리어 이외에도 중요한게 있다면.

“콘텐츠, 서비스 모두 좋아야 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여러가지 요소의 평균 점수가 80점이라고 할 때 어느 한 분야에서 과락이 있으면 소비자의 만족도가 확 떨어진다.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에 갔는데 커피가 맛없거나 서비스가 별로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진다.

고객들이 어떤 공간에 방문하는 것은 체류시간 만큼 공연을 즐기다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카페는 60분, 쇼핑몰은 90분짜리 뮤지컬을 보고 가는 셈이다. 뮤지컬을 만들 때 중간 30분은 대충 때우자고 기획하는 곳은 없지 않나. 기승전결이 만족스러워야 좋은 공연이 된다.”

온라인 기반 회사들도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글로우서울의 주요 고객사 중 게임회사, 메타버스, 코인 관련 회사 등 온라인 회사도 있다. 특정 공간에 자기 회사의 정체성을 구현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온라인의 최종 목표는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을 100% 구현하는 것인데 현재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공간을 마련해 보완하려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고객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1시간을 머무르는 것과 온라인에서 1시간 있다가는 것은 시간의 밀도가 다르다. 보통 오프라인 방문자 1명이 온라인 방문자 30명과 같다고 얘기한다. 재방문율, 구매전환율이 그만큼 차이나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공간에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은 열성팬이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의 목표가 오프라인을 구현하는 것이라면, 오프라인의 진화 방향은 무엇일까.

“온라인에서 재현할 수 없는 완성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업의 주요 타깃층도 가격과 상관없이 시간 대비 가장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선호하는 사람들로 좁혀질 것이다. 반면 온라인과 메타버스는 경제적으로 자유도가 떨어지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는 양극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