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고심 끝에 한진해운의 자율 협약을 신청키로 했다.

안종범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과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오는 23, 24일 열릴 정부 경제금융 상황 점검 회의(서별관회의)에 앞서 조 회장의 결단을 압박했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지난 3월 말 “경영권 포기 수준의 구조조정안을 내놓지 않으면 정부 지원을 받기 어렵다”고 압박한 이후 강도를 높였다.

조 회장은 2013년 이후 1조원 이상을 쏟아 부었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한진해운의 부채를 감당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8년 넘게 장기 불황에 빠져 있는 해운업계의 세계적인 불황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점도 작용했다.

조 회장이 일단 ‘백의종군'을 통해 회사를 살리는 방향으로 결단을 내렸다고 재계는 평가하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014년 5월 한진해운 창립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조양호 회장이 40년 동안 대를 이어 지킨 ‘육‧해‧공 종합물류 그룹의 꿈’을 접을까? 한진해운의 앞날과 조 회장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1986년, 2014년 한진해운 두 번 구한 조양호 회장…“모든 힘 다해 살린다” 말하기도

한진해운의 역사는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양호 회장의 부친인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선사를 설립했다.

“항공 사업이 궤도에 올랐으니 육상 운송과 항공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해운을 발전시켜 수출 입국을 세우는데 힘 써달라”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유가 창업 계기란 일화는 유명하다.

조중훈 창업주는 이후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창업 정신으로 ‘해운왕’을 자처했다. ‘육‧해‧공 종합물류 그룹’은 현재도 한진그룹의 지상 명제다.

한진해운은 1986년 적자 누적을 이기지 못 하고 1차 경영 위기를 맞았다. 당시 아버지를 도와 한진그룹 경영 실무를 총괄하던 조양호 회장은 항공사의 첨단 경영 기법을 도입, 경영 정상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조중훈 창업주가 2002년 사망하자 ‘종합물류기업’이던 한진그룹은 네조각으로 쪼개졌다.

형제간 계열 분리를 통해 삼남 조수호 회장이 한진해운을 맡았다. 장남 조양호 회장은 대한항공과 한진그룹, 차남 조남호 회장은 한진중공업그룹, 사남 조정호 회장은 메리츠금융 등 금융 계열사를 맡았다.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1990년 한부호 진수식에서 말하고 있다.

조수호 회장이 2006년 사망한 뒤 최은영 회장이 남편을 이어 한진해운을 맡았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시작된 해운업계 불황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한진해운은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대한항공을 통해 자금을 지원하던 조양호 회장은 2014년 4월 직접 한진해운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했다. 조양호 회장은 당시 취임사를 통해 “한진해운이 흑자로 돌아설 때까지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급여를 받지 않고 있다.

동생인 고 조수호 회장의 부인인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은 한진해운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최 회장과 두 자녀 조유경‧유홍씨는 4월 6일부터 20일까지 18차례에 걸쳐 한진해운 지분 96만7927만주(0.39%)를 전량 매각했다. 최은영 회장은 2006~2014년 한진 해운을 경영했다.

조양호 회장은 한진해운 인수를 통해 육상(한진)‧해운(한진해운)‧항공(대한항공)을 모두 갖춘 종합물류 그룹 재건에 성공했다.

조양호 회장은 2015년 한진해운 창립 기념식에서 “해운·항공·육상운송 각 사업의 틀을 넘는 융합의 시대를 열자”며 종합 물류 그룹의 역할을 강조했다.

한진해운은 조양호 회장이 취임한 2014년 24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2015년엔 369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면서 2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한진해운의 부채는 5조6000억원이다.

한진그룹은 2013년부터 한진해운에 1조원에 가까운 돈을 쏟아 부었다. 한진해운을 살리려다 대한항공 마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조양호 회장은 공개 석상에서 한진해운 정상화를 향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올해 1월 열린 재계 신년 인사회에서도 “해운업은 한국 물류 산업에서 필수적인 분야다. 온 힘을 다해 한진해운을 살리겠다”고 했다.

한진해운 6500TEU급 컨테이너선

◆ “정부의 잘못된 처방이 해운업계 망가뜨려"…“외국 선사 배만 불렸다”

해운업계에선 정부의 잘못된 정책들이 해운업계 전체를 절벽으로 몰아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모든 기업에 부채 비율을 200%로 유지할 것을 지시했다. 해외 선주로부터 선박을 빌려 운행하는 산업의 특성 때문에 부채 비율이 다른 산업보다 높았던 해운업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정부 지시에 따라 눈물을 머금고 보유 선박들을 팔았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들어 호황기가 찾아왔고,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팔았던 배를 고가의 용선료를 주고 다시 빌려야 했다.

현대상선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울며 겨자 먹기로 스웨덴 왈레니우스(Wallenius)에 자동차선 사업부를 15억달러에 팔았다. 왈레니우스는 3억달러만 부담하고, 나머지 12억달러는 국내 은행에서 빌렸다. 지금 자동차선 사업부(현재 유코카캐리어스)는 매년 순이익 2000억~3000억원을 내는 알짜 기업이 됐다.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따랐던 현대상선은 주인이 바뀔 위기인데, 한국 자금 빌려 배를 산 스웨덴 기업은 알짜 회사 굴리며, 한국 해운사들에게 용선료 내놓으라고 호령하고 있다.

해운업계 관계자들은 “자동차 운반선 등 다양한 종류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던 한국 해운업계를 이 지경으로 만든 당사자는 역대 정권들”이라는 분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실책으로 빈사 상태에 빠진 해운업을 살리려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지원책도 역효과를 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한국자산공사(KAMCO)를 통해 자금난을 겪고 있던 해운업체에서 배를 산 뒤 다시 빌려주는 방식으로 4700억원 규모의 중고선박 매입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하지만 배는 저가로 사고 높은 금리를 요구, 무용지물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추진됐던 수출입은행, 한국무역보험공사의 선박금융 및 해양플랜트 지원 확대 방안도 외국 선주 배만 불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9년 이후 외국 선사들이 받은 지원금은 108억달러. 부채 비율 제한에 걸린 한국 선사는 19억달러를 받았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산업은행을 통해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를 샀다가 다시 빌려주는 회사채 시장 정상화 지원 방안을 내놨다. 회사채 연장시 20%를 먼저 갚고, 나머지 80%를 1년 안에 갚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자가 기존 이자(4~5%)의 두 배가 넘는 10~12% 수준이었다. 결국 높은 상환 비율과 고금리는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을 구출하기는 커녕 위기로 몰아갔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한국무역보험공사가 참여하는 해양금융종합센터를 출범시켰지만, 1년 6개월이 지나도록 변변한 실적이 없다.

한진해운 광양터미널

중국, 덴마크, 독일, 프랑스, 이스라엘, 인도, 싱가포르, 일본 등 세계 주요 국가들은 자국 선사 보호를 위해 신규 자금을 지원하고 신용을 제공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 한국 정부만 기업들을 벼랑으로 몰아 가고 있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김영무 한국선주협회 상근부회장은 “2009년 이후 국적 선사의 선박 건조가 끊기면서 해외 선주들만 좋은 조건으로 돈을 빌려 저가로 국내 조선소에서 선박을 대거 건조했다. 해운산업 위기는 더 깊어졌다”고 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해운업을 망가뜨린 정부가 이제는 한진해운과 현대상선만 압박한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정부에서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한진해운이 자율협약을 신청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해운업 구조조정의 그림이 어떻게 그려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조양호 회장이 선친의 유지를 받아 지킨 육‧해‧공 종합물류 그룹의 꿈을 이어갈 수 있을까? 어처구니없는 정책으로 해운 산업을 망가뜨린 역대 정권의 실책을 박근혜 정부가 이번에는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조양호 회장은 고통스런 결단을 내렸고, 해운업계는 비탄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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