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앞둔 24일 오후 서울역에서 시민 및 귀성객들이 열차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에는 카카오톡이 좀 조용했으면 좋겠어요.” 지난 23일 이렇게 말한 이모(28)씨는 이번 설 연휴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이씨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순수학문으로 석사까지 졸업한 뒤 지금은 입시 논술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며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씨가 고향에 내려가지 않기로 한 표면적 이유는 취업 준비 때문이지만, 사실은 지난 추석 때 일어난 ‘사건’ 때문. 이씨는 “취업 준비를 핑계로 작년 추석 때도 고향에 안 내려갔는데, 단톡방에서 어머니가 다른 가족과 저녁을 먹는 사진을 올린 걸 보고 다음 날 심하게 다퉜다”고 했다. 원래는 박사 학위도 딸 생각이었으나, ‘취업 좀 하라’는 어머니 성화에 진로를 바꿨는데, 속상하기도 하고 화도 났던 것. 이씨는 “어떤 것이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비슷한 마음일 것 같다”고 말했다.

설 연휴를 앞두고 ‘가족 카카오톡 단체채팅방(단톡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입시나 취업, 결혼 등 전통적인 소재 외에 올해는 계엄과 탄핵 등 정치권 극한 대립 때문에 ‘단톡방 침묵’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올라온 미혼 여성 정모(31)씨는 “카카오톡 가족 단체 채팅방(단톡방) 알람을 꺼뒀다. 그랬더니 좀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알람을 끈 단톡방에는 아버지 형제 가족들 12명이 모여 있다. 지금은 가끔씩 “네” “넵” “넹” 같은 의례적이 답변만 남긴다. “얼마 전에 제 동생이 저보다 먼저 결혼한다고 어머니가 말을 꺼냈거든요, 그랬더니 ‘너는 안 하니’ ‘남자친구는 있니’ 등 관심이 너무 쏟아져서… 이제 설이니 고향 내려가면 얼굴을 봐야 할 텐데, 참 걱정돼요.”

건강이 나빠져 2년쯤 쉬다가 얼마 전 재취업에 성공한 30대 여성 문모씨는 이번 설에는 ‘잔소리’를 듣지 않을 줄 알았다. 문씨의 말이다. “아버지가 (제가 다시 직장을 얻자) 신나서 조부모님에게 얘기했더니, 할머니가 ‘그러면 이제 결혼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더라고요.” 문씨는 할머니가 카카오톡으로 백화점 상품권을 주면서 ‘결혼할 사람 생기면 선물 사줘라’라고 하시는데,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정신 없는데 할머니께서 저러시니 명절에 내려가기 싫어졌다”고 했다.

정치는 가족 간 다툼을 일으키는 주요 화제지만, 이번 설을 앞두고는 극한 대립 국면 속에서 위험이 더 커졌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이모(38)씨는 시아버지가 ‘태극기 부대’라고 했다. 이씨는 “시아버지가 가족 단톡방에 ‘경찰, 사법부가 중공에게 매수당했다’는 식의 유튜브 영상을 올린다”며 “온 가족이 모였을 때 남편이 가끔 ‘유튜브 같은 건 거짓말 같아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시아버지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번 설 연휴는 평소보다 길어 다툼이 날 것 같다면서 친정에 며칠 가 있겠다고 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자녀 때문에 속상하다는 부모도 있었다. 지난 21일 탄핵심판 3차 변론에 출석한 윤석열 대통령을 응원하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을 찾은 이모(68)씨는 “딸만 둘인데, 다 민주당을 지지한다”면서 “가족 단톡방에 내가 계속 뉴스와 유튜브 영상을 올리다가 작년 12월 말쯤 대판 싸웠다. 지금은 소강 상태인데, 명절에 분위기가 안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첫째 딸은 이씨에게 따로 전화해서 ‘명절에 집에 있으면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다가 또 싸울 것 같으니 식당을 잡아 밥을 먹자’고 했다고 한다. 이씨는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상황이 반대인 가족도 있다. 현모(31)씨는 부모님이 호남 출신이어서 진보 성향이고, 자신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싫어서 보수 지지자가 됐다고 했다. 그는 “부모님이 최근 극성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법에서 잡히는 유튜브 영상을 계속 공유하면서 ‘이래도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게 맞느냐’고 설교한다”면서 “민주당 잘못은 얘기해도 들은 척도 안 한다. 화가 나서 최근 가족 단톡방에서 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설 연휴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