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떡같이 말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찰떡같이 말해주세요’라는 문장 때문에 이 책을 골랐습니다”

지난 14일 오후 6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서울시 관악구의 작은 서점 ‘관객의 취향’ 진열대에는 포장지로 둘둘 싸여 제목도 작가도 알 수 없는 책들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서점 주인이나 직원이 아니라 책방 손님이 직접 쓴 추천사가 붙어 있었다. 이 서점에서 진행하는 ‘릴레이 블라인드 북 행사’의 일환이다. 박소예(34) 대표는 “책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독자 추천 문구로 책 구매를 결정하는 우리 서점만의 특별한 이벤트인데 반응이 좋다”면서 “책이란 공통 매개를 통해 독자들끼리 연결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출판업이 고사 위기에 놓였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독립서점이 MZ세대(밀레니얼+Z세대·1981~2010년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독립서점은 대규모 자본이나 큰 유통망에 의지하지 않고 서점 주인의 취향대로 꾸며진 작은 서점을 의미한다. 사교의 장이자, 지식 교류의 장이던 18세기 프랑스 ‘살롱’의 현대판과 비슷하다. 고객이 추천하는 책을 비치하고, 구하기 힘든 독립 출판물을 판매하면서 독서회 개최, 공간 대여 등 서점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 지역 서점은 여행하면 반드시 들러야 할 명소가 돼 자체 굿즈(상품)를 제작해 판매할 정도다.

14일 서울 관악구 독립서점 <관객의 취향>에 놓여있는 블라인드북. 먼저 책을 읽은 독자의 추천문구로 표지도 모르는 책 구매를 결정하는 이벤트./소가윤 기자

◇ 독립서점 1년 만에 70개 증가… 새로운 경험 원하는 MZ에 인기

15일 독립서점 소개 사이트 동네서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에 운영 중인 독립서점은 모두 815곳으로 전년보다 70곳 늘었다. 출판업계 침체에도 독립서점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경험과 개성을 중시하는 MZ세대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서다. 동네서점 관계자는 “독립서점 이용자의 약 80%가 20~30대로 가치 소비와 공유에 적극적인 세대”라며 “독립서점은 일상에서 언제든지 산책하듯 들러 이웃과 만나고 휴식과 영감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동네서점의 성장세는 대형서점이 직면한 위기와 비교하면 더욱 극명하다. 대형서점은 독서인구 감소로 2019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돼 신규 출점이 5년간 1개로 제한될 정도로 수익성 악화에 직면해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된 예스24, 알라딘, 영풍문고, 교보문고 등 4대 대형서점의 작년 감사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작년 매출액은 2조721억원으로 전년(2조253억원)보다 2.3%(468억원)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2021년 298억원에서 지난해 199억원으로 33.3%(99억원) 줄었다.

독립서점의 차별화 요인은 기존 서점은 물론 이커머스에서 살 수 없는 물건이나 경험을 판다는 것이다. 이색 잡지나 SF소설과 같은 독립 출판물뿐만 아니라 자체 상품(굿즈)부터 커피, 베이커리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독서 모임이나 음악회 같은 행사도 개최한다. 동네 책방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주식회사 동네서점이 815개 서점을 설문한 결과를 묶은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독립서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중 가장 많았던 것이 커피·차 판매(29.1%)와 독립출판물 판매(21.0%)였다.

서울 마포구 합정역에 위치한 아인서점에는 대형출판사 간행물이 없다. 이곳은 독립출판물만 판매하는 곳이다. 익숙하지 않은 고객들을 위해 서점 주인 취향에 맞춰 매달 추천 도서를 선정하는 ‘큐레이션(우수한 작품을 뽑아 전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평원(38) 대표는 “코로나19로 중단됐던 독서 모임을 올해 중 다시 열 계획이다”라면서 “서점은 손님이 와야 살아나는 공간이고, 독서 경험을 통해 특별한 기억을 선사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문을 연 마포구 연남동의 ‘독서관’은 무료 독립 서적 대여 서비스를 도입해 인기를 끌고 있다. 대여 서비스 회원은 서비스 시작 1년 만에 회원이 600명에 도달했다. 전세환(30) 대표는 “재방문율을 높여 회원이 1000명으로 늘면 나중에 식음료를 함께 판매할 정도의 공간으로 확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 명물로 거듭난 독립서점도 있다. 강원도 속초시의 문우당서림은 1984년 당시 5평 규모의 작은 동네 서점으로 문을 열어 현재 250평 서가에 9만 부의 도서가 있는 종합 서점으로 성장했다. 공간대여 서비스와 자체 제작 상품(굿즈) 판매 등으로 인기를 끌어 사업을 확장했다. 이곳 단골인 한모(30) 씨는 “서점마다 판매하는 책과 소개하는 방식이 달라 공간을 구경하는 게 흥미로워 여행을 다니면 독립서점을 꼭 방문한다”며 “‘굿즈’를 구매해 기념품으로 간직하거나 선물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강원도 속초시 독립서점 '문우당서림'에는 구비된 책 속 글귀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공간이 있다. / 이현승 기자

독립서점들이 이렇듯 다채롭게 변신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한 탈피이기도 하다. 2021년 기준 국내 독서인구 비중은 45.6%로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책 읽는 인구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단순 도서 판매만으로는 수익을 남기기 어려운 구조다. 이에 음료나 자체 출판물이나 상품(굿즈) 판매, 공간 대여나 독서회·음악회 개최 등 다양한 상품과 행사를 통해 ‘경험’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독립서점의 인기 비결로 개성과 취향을 꼽았다. 대형서점이 줄 수 없는 인간적 경험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독립서점은 대형서점과 달리 책만 팔지 않고 커뮤니티 공간을 제공하면서 서점마다 개성이 담긴 콘텐츠를 제공한다”며 “MZ세대들은 그런 공간에 방문해 경험하고 소통하면서 책 소비를 하는 데 흥미를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MZ세대들이 메타버스나 사이버공간으로 이동한다고 하는데, 사실 코로나19로 인해 접촉할 수 있는 경험에 대한 욕구가 더 많아졌다”며 “예전의 대형서점에서는 단순히 책을 골라 사서 자리를 떴지만, 독립서점은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공간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