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g에 2500원’이라고 쓰여진 저울 위에 여성용 민소매와 반팔 셔츠, 쉬폰 원피스 3벌을 올렸더니 총 1만3400원, 1벌당 4500원이라는 가격이 매겨졌다. 중고 의류이긴 해도 일본 SPA(생산부터 유통, 판매까지 관여하는 것) 브랜드 유니클로의 반팔 티셔츠 한장이 1만원을 훌쩍 넘는 걸 감안하면 시중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값이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이곳은 중고 의류 전문 매장으로 이렇듯 옷을 무게당 가격을 매겨 이름처럼 매우 싼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5일 이 매장에서 만난 고등학생 윤호찬(17)군은 “옷에 관심이 많은데 용돈이 얼마 없어 고민하다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가게 정보를 보고 왔다”며 “중고 매장이라고 해서 살만한 옷이 없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여름 옷이 많아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옷 무게에 따라 가격을 책정하는 ‘킬로 세일(kilo sale, 무게를 재는 단위인 킬로그램과 판매를 뜻하는 세일을 합한 말)’ 중고 의류매장에 MZ 세대(밀레니얼+Z세대·1981~2010년생)가 몰리고 있다. 비싼 물건을 소유하기보다 새로운 경험을 우선시하는 이들에겐 무게를 재서 옷을 판매하는 방식이 신선할뿐더러 가격도 일반 구제 의류 매장보다 저렴해 1석2조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패션 중고거래 플랫폼 스레드업(ThredUp)이 작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중고 의류 시장 규모는 작년 1770억달러(230조원)로 전년 대비 28% 증가했으며 2027년까지 3500억달러(455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국내에선 당근마켓, 번개장터, 중고나라 등에서 중고 의류, 잡화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등 유통 빅3도 중고 거래 플랫폼에 투자하거나 직접 전문 오프라인 매장을 냈다.
중고 시장 성장을 이끄는 건 10~30대다. 이들은 중고 물품을 ‘헌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몇번 쓴 물건을 팔아 돈을 벌거나 판매가보다 저렴하게 구매하는 가성비 높은 소비 행위를 즐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기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사람들이 도보 생활권 내에 있는 동네 주민과 만나 중고 거래를 할 수 있는 당근마켓을 활발히 하기 시작하면서 중고 거래에 대한 진입 장벽이 많이 사라졌다.
중고 거래에 킬로 세일을 합한 판매 방식을 도입한 매장이 주목 받기 시작한 것도 코로나 기간이다. 서울, 경기 등 수도권에서 기존에 도매상만 상대로 영업하던 매장이 소매 고객에게도 판매를 시작하거나, 기존 매장의 2·3호점을 내는 사례가 나타났다.
경기도 광주의 한 중고 의류 창고를 4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A(45)씨는 주로 도매업자들에게 중고 의류를 최소 40㎏씩 판매하다가 2~3년 사이 소매 고객들의 문의가 늘면서 판매 단위를 1kg로 확 낮췄다. 그는 “몇 년 사이에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량으로 중고 옷을 판매하는 젊은 사장들이 늘었는데, 이들에게 소량으로 옷을 팔다 보니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도 1㎏ 단위로 판매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방이동 중고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박준성(39)씨는 “보통 중고 의류 매장에서도 명품 브랜드 옷은 가격을 비싸게 책정하는데, 여기에서는 보세와 명품 브랜드에 차등을 두지 않고 무게로 가격을 매겨 젊은 고객들에게 호응이 좋다”며 “박리다매 형태로 운영하기 때문에 옷 회전율이 빠르고 브랜드 구분 없이 좋은 옷을 많이 팔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중고 의류를 무게당 가격으로 판매하는 방식은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는 ‘킬로 세일’이란 이름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2011년 이탈리아 패션유통업체인 릴라인터내셔널그룹이 운영하는 킬로파숑 매장이 시초인 것으로 전해진다. 소비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옷을 살 수 있는 데다 버려지는 옷을 재소비 하는 친환경 소비를 할 수 있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소비자들이 킬로 세일 매장을 찾는 이유가 저렴한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일반적인 의류 판매 방식에 무게를 재는 요소를 더한 것이 평범함을 넘어 유쾌한 소비를 원하는 젊은 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이날 건국대 근처의 한 중고 의류 매장을 찾은 이모(23)씨는 “예전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 개수에 따라서 일정 가격을 지불하면 임의로 옷이 배송되는 ‘랜덤박스’가 유행할 때 즐겨 구매했는데, 무게에 따라 옷을 구매하는 방식도 그것과 비슷한 재미가 있다”며 “일단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고 나중에 가격을 알 수 있어서 친구와 서로 가격을 예상해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