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쌀값 하락을 막는다며 남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강행 통과시키자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당이 방송법 개정안과 이른바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도 강행 처리할 태세여서 윤 대통령이 또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비슷한 상황인 간호법 제정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간호단체가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당시 간호법 제정을 약속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간호협회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국회 본회의를 하루 앞둔 12일 국회 앞 의사당대로에서 열린 간호법 국회 통과 촉구 수요한마당에서 '간호법 제정' 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뉴스1

12일 국회에 따르면 민주당은 오는 13일 열리는 국회 본회의에서 간호법을 강행 처리할 예정이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전날(11일) 의료현안 민·당·정 간담회에서 간호법을 ‘간호사처우개선법’으로 수정하는 중재안을 공개했지만, 민주당은 수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민주당 오영환 원내대변인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민주당은 간호법 제정안을 본회의에서 원안 처리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이 간호법 제정안 처리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것은 윤 대통령이 대선 당시 간호법 제정에 찬성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오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지난 대선 당시) 여야 대통령 후보가 간호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고 했다. 간호계도 이 같은 인식에서 간호법 원안을 고수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대한간호협회는 ‘수용 불가’ 입장을 밝히며 당정 회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간호단체는 당정의 중재안 중 ‘지역사회’ 문구를 삭제하는 부분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이 입법을 추진하는 간호법 제정안에서 제1조(목적)에는 “이 법은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간호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이라는 내용이 있다. 의사단체는 ‘지역사회’ 문구가 들어가면 지역에서 간호사들이 의사 지시 없이 독립적인 의료활동을 하게 될 수 있다고 반대하고 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11일 국회에서 열린 의료현안 민·당·정 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강기윤 국민의힘 보건복지위 간사, 박대출 정책위의장, 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 이형훈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회장, 김영경 대한간호협회 회장.장. /뉴스1

이 같은 내용은 지난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이재명 대표의 공약에는 포함돼 있다. 이 대표의 대선 공약집에는 ‘지역의사제, 지역간호사제 도입으로 지역·공공·필수 의료인력 대폭 확충’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공중보건간호사를 도입하겠다고도 했다. 뒤이어 ‘전 국민의 보편적 건강 보장을 위한 간호법 제정 추진’ 항목에서는 간호인력 확보·적정배치·처우개선을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에는 간호법 제정과 관련한 내용이 없다. ‘간호’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공약도 없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국정과제에도 간호법과 관련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윤 대통령은 대선 당시인 지난해 1월 11일 대한간호협회 간담회에서 “(코로나19에 대응한)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에 우리 국민과 정부가 합당한 처우를 해 주는 것이 바로 공정과 상식”이라며 “간호사 업무 환경 개선을 위해 정부뿐만이 아니고 국회가 제 역할을 해 주도록 저도 우리 원내 지도부와 의원님들께 간곡한 부탁을 드릴 생각”이라고 했다.

또 윤 대통령은 당시 간호협회 관계자들에게 “(간호법은)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논의한 대로 정부가 조정안을 가져오면 국민의힘은 즉시 간호법 제정이 논의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했다. 현재 국회 본회의에 부의돼 있는 간호법처럼 민주당이 여당과 합의 없이 보건복지위에서 간호법을 직회부한 상황에 대한 언급은 아닌 셈이다. 또 윤 대통령은 정부가 마련한 조정안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야권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간호법을 수용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지난 대선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의료 공약. /민주당 제공

민주당은 당정이 마련한 중재안을 검토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오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국민의힘의 중재안은 시간끌기용 쇼에 불과하다”며 “이미 법안 심의 과정에서 (민주당이) 불가하다고 했던 내용들을 마치 새로운 것처럼 내놓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간호법 제정을 강행하는 것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약 50만명 수준인 간호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이 간호법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