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대학생 이모(22)씨는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고 한 과목의 시험 족보와 필기물을 1만5000원 주고 샀다. 이 과목의 시험은 족보가 존재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퍼져있어 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씨가 구입한 족보는 다른 과목의 2019년도 필기 노트였다. 이씨는 “거래를 할 때 해당 과목 족보인지 확인을 하지 않았다”며 “족보 사기를 당한 것인데 이 자체가 불법이니 신고도 못한다”고 말했다.
최근 기말고사를 앞둔 대학교에서 일명 ‘족보 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족보’란 이전에 출제됐던 시험 문제들을 정리해둔 것으로, 매해 비슷한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교수의 수업일수록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게 유리해 이를 돈을 주고서라도 구하려는 학생들이 많다. 이 때문에 시험기간만 되면 각 학교 커뮤니티 등에는 족보를 구하고, 판매한다는 거래글이 활발하다.
당초 ‘족보’는 거래보다는 선후배끼리 전승되는 문화였지만, 코로나19로 선후배 간 교류가 사라진 ‘코로나 학번’ 학생들에게는 아예 돈을 주고 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족보 거래 자체가 위법이기 때문에 사기를 당하더라도 법의 보호를 받기 힘들다는 점이다. 족보 자체가 저작권 침해에 해당할 수 있다.
학생들이 족보 사기를 당하고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하다보니 사기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대학생 박모(24)씨는 최근 A과목의 지난해 버전 전공과목 족보를 2만원 주고 샀다. 담당 교수가 시험 문제를 지난해부터 완전히 바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족보는 3년 전 필기였다. 박씨는 “의학계열 전공수업이라 너무 공부할 게 많았다. 전공과목 일부를 족보로 공부하고 적어도 유급은 안 되게끔 학점은 유지하고 싶었다”며 “교수님의 창작물인 시험문제를 족보로 사고 파는 게 불법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은 커뮤니티 등지에서 ‘족보 사기범’을 직접 공유하고 나서는 등 대응하고 있다. 족보 사기범의 계좌와 이름 정보 등을 공유하는 식이다. 대학생 채모(26)씨는 “사기범의 계좌와 이름을 공유하고 사기 수법을 알리고 있다”면서 “신고는 하지 못하니 사기를 예방이라도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족보 사기’도 ‘사기행위’에 해당되므로 신고를 하는 게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다른 과목의 족보를 팔았다거나 최신이라 속이고 옛날 족보를 팔았다면 속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에 명백한 사기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신동미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사기는 재산상의 손해가 발생했느냐가 관건”이라며 “해당 족보가 자신이 찾는 족보인 줄 알고 샀다가 속았다라는 것을 알았다면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게 피해를 해결하는 강구책”이라고 말했다. 이어 “족보의 저작권 위반 여부는 별 건으로 다시 봐야 하는 사안일 뿐더러 시험을 앞두고 학생들의 급박한 심리를 이용해 사기를 친 것이기 때문에 공적인 접근도 필요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진규 변호사는 “아예 다른 과목의 족보를 팔았다거나 최신 3년 혹은 올해 족보라고 해놓고 5년 전 족보를 돈 주고 팔았다면 그것은 엄연히 속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사기행위로 볼 수 있다”며 “해당 족보가 시험지 자체를 복사해서 넘기는 게 아닌, 학생들이 복기해서 만든 것이라면 차라리 2차 저작물로 볼 수 있어 저작권 위반 혹은 침해로 보기 어렵다. 때문에 피해 구제받기 위해서라도 신고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족보 매매를 안 하는 게 가장 최우선”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