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개팅을 한 직장인 전은경(28)씨는 상대방과 이른바 ‘깻잎 논쟁’으로만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깻잎 논쟁’은 자신의 연인이 이성 지인이 먹으려는 깻잎지를 직접 떼주는 것을 용인할 수 있냐는 것을 주제로 한다. 한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작된 논쟁이 격화되면서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후 의견이 갈리는 여러 애매한 상황을 주제로 한 논쟁들도 덩달아 유행하기 시작했다.
전씨는 “논쟁이라고 호칭하지만, 초면인 사람들과 친해지려 하거나 대화거리가 떨어졌을 때 이만한 주제가 없다”면서 “요즘 소개팅을 자주하는데 논쟁 시리즈로 말할 때 시간도 잘 가고, 호구조사가 아닌 형태로 상대방의 성향이나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최근 2030세대 사이에서는 특정 상황을 가정해 ‘누구의 의견이 더 일리가 있는가’를 논하는 ‘논쟁 시리즈’가 유행하고 있다. ‘깻잎 논쟁’처럼 의견이 첨예하게 갈릴만한 상황을 설정하고, SNS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이다. 청년들은 이런 논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앞서 유행했던 MBTI 검사처럼 간단하게 자신의 정체성과 성향을 드러내고,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는 효과가 있다는 반응이다.
27일 인스타그램 검색 결과에 따르면 깻잎논쟁을 주제로 한 게시물은 2257개에 달한다. 여타 다른 논쟁들이 등장하는 게시글까지 더하면 수만개에 이른다. 틱톡에서는 깻잎논쟁을 주제로 한 영상 조회수가 2120만회를 기록했다. 유튜브에서도 이를 주제로 한 몰래 카메라 형식 영상을 쉽게 시청할 수 있다.
‘깻잎 논쟁’은 지난 2018년 한 방송 프로그램의 패널들이 관련 일화를 소개한 것을 두고 아이돌 팬 등이 이를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묻는 질문으로 재생산하며 유행이 시작됐다. 유명인들이 참여하고, 일반인들도 이를 따라 SNS 등에서 논쟁에 참여하며 하나의 현상이 됐다.
이를 필두로 ‘패딩 논쟁(애인이 내 친구의 패딩 지퍼를 올려줘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 ‘블루투스 논쟁(애인의 자동차·아이팟 등을 친구가 블루투스로 연결해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 ‘소주 논쟁(술에 취해 쓰러진 본인을 두고 애인과 친구가 단둘이 소주를 마셔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며 유행에 불을 지폈다.
2030들은 ‘논쟁 시리즈’가 현실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소통법이라는 반응이다. 논쟁의 특성상 각기 의견이 갈려 대화가 길게 이어질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가 아니라 부담도 없고 이 과정에서 각자의 성향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어 친목의 도구로 제격이라는 평가다. 앞서 유행했던 MBTI 테스트처럼 자신이나 타인을 유형화하는 것에서 한 차원 나아가 각자의 의견으로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회식을 할 때 등 세대를 뛰어넘은 소통도 돕는다. 사회초년생인 오희주(25)씨는 상사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새우 논쟁’ 덕을 봤다. 회식 메뉴였던 새우요리를 두고 ‘새우논쟁(애인이 내 친구의 새우를 까줘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자 대화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기 때문이다. 오씨는 “아직 출근한 지 일주일도 안 됐지만 사수들의 성향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과 성향을 파악하기도 한다. 직장인 장희준(32)씨는 친구들과 한 술자리에서 시작된 ‘소주 논쟁’에서 자신이 생각보다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씨는 “가정한 상황임에도 화가 났다”며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어서 꺼낸 논쟁 시리즈였는데 생각보다 저에 대해 또 새로 발견한 것 같아서 신기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에는 코로나 펜데믹 이후 높아진 MZ세대의 사회적 소통에 대한 열망과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확인받고 싶은 성향이 반영됐다고 분석한다.
임명호 단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MZ세대는 기성세대보다 ‘상호성’이 굉장히 뛰어난 세대”라며 “논쟁이라고 표현은 되지만 실상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다른 것들을 얘기하고 토론하고 상호보완하는 대화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단절된 타인과의 교류에서 다시금 자신의 정체성·가치관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반영된 대화법”이라며 “논쟁 시리즈는 결국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밸런스 게임’으로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성향을 간접적으로 파악하면서 관계를 쌓아갈 때 불필요한 과정을 줄이고자 하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MZ세대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