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혼인 신고를 하고 자녀 출생 신고까지 한 남성이 40여년 전 이미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실을 정부가 뒤늦게 파악하고 그 자녀의 대한민국 호적을 말소했다. 평생 자신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알고 살던 자녀는 ‘대한민국 국적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까지 가서 패소했다. 1997년 국적법 개정 전까지 우리나라 국민은 출생 당시 아버지가 대한민국 국민이어야 한국 국적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부모 중 한 사람만 대한민국 국적이면 자녀도 한국인이 된다.

2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뉴스1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지난 9일 A씨가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대한민국 국적 취득 신고를 반려한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했다. 심리불속행 기각이란 원심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 등의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별도로 이유를 명시하지 않고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하는 것이다.

A씨는 1980년대에 한국에서 아버지 B씨와 한국인 어머니 C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C씨는 당연히 남편 B씨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했고, 한국에서 혼인 신고를 했다. A씨에 대한 출생 신고도 마쳤다. A씨 호적에는 부모 모두 한국 국적으로 기재돼 있었고 A씨도 한국인으로 살았다. 이후 B씨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생활하다 2016년부터 모녀와 연락이 끊겼고 2019년 사망했다.

그런데 2021년 대구출입국 외국인사무소장은 ‘B씨가 1974년 일본 국적을 취득해 국적을 상실했다’는 내용을 고시했다. 알고보니 B씨는 태어날 때 한국 국적이었지만, 일본인과 결혼해 한국 국적을 상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C씨와 결혼한 것이다. B씨는 한국 법원에도 한국 국적 상실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문제는 B씨가 한국 국적을 상실하면서, 구(舊) 국적법에 따라 자녀인 A씨의 호적이 말소된 것이다. A씨는 한국 국적을 되찾을 방법을 고민하다 2004년 말 유효기한이 끝난 ‘모계특례 국적취득 제도’를 2022년 신청했다. 이 제도는 국적법 개정 전에 태어난 사람도 한국 국적 어머니가 있으면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허용해주는 것이다.

법무부는 특례제도 유효기한이 끝났다는 이유로 A씨의 국적 취득 신고를 반려했다. A씨는 이에 불복해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냈다. A씨는 국적법 부칙에 주목했다. 부칙에는 ‘천재지변 기타 불가항력적 사유로 특례제도를 기한 내에 신청하지 못했다면 그 사유가 소멸한 때로부터 3개월 내에 신고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고 돼 있다. A씨는 아버지가 일본으로 귀화한 것을 몰랐던 것이 천재지변 기타 불가항력적 사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 2심 법원은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아버지인 B씨가 자신이 일본 국적인 사실을 알리지 않아 국적 취득 신고를 못 했다는 건 A씨의 주관적인 사정일 뿐이며 이를 천재지변 기타 불가항력적 사유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A씨는 특례기간 이후인 2016년쯤까지 B씨와 연락을 해왔다”며 “그동안에 아버지가 일본 국적자인 것을 알게 돼 특례기간 내 국적 취득을 신고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했다.

A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그러나 2심은 1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 항소를 기각했다. 이에 A씨는 상고했지만, 대법원도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