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10월, 자금 운용액 기준 국내 1위였던 라임자산운용(라임)이 펀드 177개에 대해 환매 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개인 투자자 4000여명의 돈 1조6000억원이 묶였다. 이른바 ‘라임 사태’의 시작이다. 검찰 수사가 본격화 되고 라임의 배후 전주(錢主)로 알려진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은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0년을 선고 받았다.
돈을 굴린 라임이 파산하자, 투자자들은 펀드를 구매한 증권사로 달려갔다. 환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송을 제기했다. 2020년 2월 개그맨 김한석씨와 아나운서 이재용씨 등 투자자들은 펀드 손실 위험을 알리지 않아 착오를 일으켰다며 대신증권을 상대로 투자금을 반환해달라고 소송을 냈다. 펀드 판매사 중 한 곳이 대신증권이다.
투자자들은 장모 전 대신증권 반포WM센터장이 라임 펀드 총 17개를 투자자 470여명에게 판매하면서 ‘완전히 안정적’, ‘확정 금리형 상품’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1심은 “대신증권은 김씨 등에게 투자금 전액을 반환하라”며 투자자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라임 펀드 판매 행위를 ‘사기에 의한 계약 체결’이라고 판단해 투자자들의 계약 취소 주장을 받아들였다. 향후 이어질 수 있는 라임 판매 증권사 상대 소송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9월 항소심 재판부는 투자자인 원고 주장을 일부 기각했다. 투자금 전액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대신증권과 투자자 사이에 ‘수익증권 매매계약’이 체결됐다고 본 1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 주효했다. 재판부는 라임 펀드 판매 행위가 ‘무명계약’이라고 판단했다. 무명계약이란 민법에서 규정한 계약이 아닌 계약을 말한다. 민법에서 인정하는 계약이 아니므로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는 법 조항 적용도 받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법무법인 태평양은 항소심에서 대신증권을 대리해, 증권사와 투자자 간 계약이 형태를 알 수 없는 무명계약이라는 고등법원 첫 판단을 이끌어냈다. 이혁(사법연수원 26기) 태평양 변호사는 “많은 펀드가 가입이 이뤄지고 있는데 양자를 규정한 대법원 판례 등 법률관계가 없다”며 “우리가 보기에는 수익증권에 관한 매매계약으로 보지 않는 게 명백했고, 투자자들은 펀드를 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고판다는 개념도 모호하다”고 말했다.
◇투자자 “대신증권 반포WM센터장, 펀드 위험성 알리지 않아”
1심은 “대신증권은 김씨 등에게 투자금 전액을 반환하라”며 투자자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대신증권과 투자자 사이에 ‘수익증권 매매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판단했다. 수익증권 매매계약은 민법이 규정하는 유명계약의 하나로 110조 적용을 받는다.
민법 제110조는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1항) ▲상대방있는 의사표시에 관하여 제3자가 사기나 강박을 행한 경우에는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만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2항) ▲전2항의 의사표시의 취소는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3항)’고 규정하고 있다.
‘투자금 전액 반환’ 청구서를 받아 든 대신증권은 항소심에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했다. 강동욱(23기), 이혁(26기), 이상재(38기) 태평양 변호사는 1심 논리를 깰 수 있는 법리를 고민했다. 이들은 투자자들 주장처럼 수익증권 매매계약이 체결된 것인지를 먼저 따졌다. 계약이 취소되려면 먼저 성립됐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계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1심 판단처럼 ‘계약 취소’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상재 변호사는 “자본시장법, 신탁법 등에서 근거를 찾아 수익증권에 관한 매매계약이 체결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어 “증권사가 중개행위 과정에서 설명의무 등 잘못이 있다면 자본시장법 책임을 지게 돼 있다”며 “투자자들 주장처럼 상품에 잘못이 있으면 자산운용사에 책임을 물어야 하고, 중개행위에 잘못한 것만 책임지는 게 법리상 옳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라고 설명했다.
‘매매계약’이라면 사기나 착오에 의해서 계약을 취소할 수 있는지를 다퉈볼 수 있지만 단순히 ‘중개’ 행위를 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증권회사가 매매를 중개한 것에 불과하므로 책임 소재와 범위가 달라진다. 태평양은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혁 변호사는 “1심에서 투자자 주장인 ‘수익증권에 관한 매매계약’이 인정된 만큼 항소심에서는 법률관계 성격이 뭔지 집중적으로 화력을 퍼부었다”고 했다.
◇재판부 “자본시장법상 투자자와 중개인 사이는 ‘무명계약’”
항소심 재판부는 태평양 주장을 받아들였다. 서울고등법원 민사14-3부는 투자자와 증권회사, 즉 중개인 사이를 ‘무명계약’이라고 판시했다. 증권사와 투자자 사이의 수익증권 매매계약 체결을 부정하고, 매매계약은 아니지만 형태를 알 수 없는 계약으로 봤다. 이는 고등법원 최초의 판단으로 판례 형성 과정에서 나온 ‘리딩 케이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재판부는 1심을 일부 뒤집고 원고 소가(25억1499만원)의 약 77%에 해당하는 19억5436만원만 돌려주라고 판단했다. 대신증권 기망으로 착오에 빠져 펀드에 가입했다는 투자자들 주장을 기각한 것이다. 설명의무, 부당권유 금지의무 위반은 인정했지만 손해액 80%로 제한했다.
이혁 변호사는 “항소심에서는 투자자들이 장 전 센터장에게 속아서 펀드에 가입한 것으로 본 게 아니다”며 “수익률 보장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판단에 따라서 펀드에 가입한 것이지 착오에 빠져서 가입한 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상재 변호사는 “여러 라임 펀드 사건이 1심에 계류돼 있는데 앞으로 이 판결을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라임 펀드 관련해 사기 또는 착오를 이유로 취소 주장이 상당히 난립하고 있다”며 “이것들을 정리해서 사기 또는 착오가 안된다는 최초의 고등법원 판결”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