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손민균

별정우체국 제도는 종종 ‘현대판 음서제’ ‘매관매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 우체국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도서 산간지역 주민들을 위해 도입됐지만, 여러 폐단을 낳았기 때문이다. 별정우체국장은 일반직 공무원 6급 대우를 받는데, 이 직(職)을 합법적으로 자녀나 배우자 등에게 승계할 수 있기 때문에 세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왔다. 국회에서 개정 논의도 있었고, 우정사업본부도 개선안을 내놓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바뀐 것은 없다.

최근 이러한 별정우체국 제도에 일침을 주는 판결이 나왔다. 경남 거제의 한 별정우체국장이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저질렀는데, 법원이 이 피해금을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피해자들을 대리해 1·2심에서 모두 승소를 이끈 법무법인 원의 박창환(사법연수원 37기) 변호사는 “별정우체국에 대한 국가의 관리·감독 소홀은 일부 국장들의 사기 범행의 단초를 제공했다”며 “효율적인 관리·감독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별정우체국이 낳은 폐단… 지역민 상대 ‘사기’

사건은 지난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건을 일으킨 양모(66)씨는 2012년부터 4년간 경남 거제의 한 별정우체국 국장을 지냈다. 원래 국장이었던 남편으로부터 승계받은 것이다. 남편 역시 그의 부친으로부터 2대째 물려받아 이 별정우체국을 운영했다. 양씨의 범행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집안 대대로 별정우체국을 운영하며 쌓은 집안의 신뢰, 자신 또한 지역 주민인 점을 이용해 아들의 고교 학부모와 글을 모르는 노인들에게 접근한 것이다.

양씨는 “내게 예금을 맡기면 더 높은 이율로 지급하겠다”며 주민들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다. 같은 지역에서 오랜 시간 얼굴을 마주한 양씨를 믿었던 지역 주민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자신들의 통장과 도장까지 주며 돈을 맡겼다. 양씨는 이 돈을 받아 정상적으로 우체국 예금통장을 만들었고, 약속한 5~7% 상당의 수익금을 돌려줬다.

하지만 문제는 2017년 불거졌다. 해당 주민들이 돈을 찾겠다고 했지만, 양씨는 차일피일 미뤘다. 6개월여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양씨가 돈을 돌려주지 않자 우체국을 찾아갔던 주민들은 “맡기신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소식을 접했다. 주민들은 심지어 양씨가 국장을 그만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후 피해자들의 고소로 시작된 수사 결과, 양씨는 주민들의 도장을 이용해 별도의 출금 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고, 이를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이 도장으로 주민들에게 출금 연락이 가지 않도록 문자서비스 등을 해지해 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양씨는 1심에서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지난 2021년 5월 확정됐다. 돈을 맡겼던 주민들의 피해액은 약 40억원 상당인 것으로 추정됐지만, 피해금을 회수할 방법은 없었다. 이미 양씨가 주민들 예금을 모두 사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양씨 명의로 남은 재산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일러스트=정다운

◇피해금 복원 어려운 상태에서 ‘국가 책임’ 전략 내세운 법무법인 원

이때 법무법인 원은 ‘국가배상’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박 변호사는 국가가 별정우체국장을 지정해 설립 인가를 내주므로 별정우체국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이 국가에 있고, 우체국이 예금도 관리하니까 이에 대한 책임 역시 국가에 있다는 논리로 접근했다. 박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우체국에 예금을 전달한 것이므로 대한민국과 예금계약을 맺은 것으로 볼 수 있다”며 “해당 사건은 피해자들이 예금계약을 해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가 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논리”라고 설명했다.

반면 정부 측에서는 책임이 없다며 맞섰다. 주민들이 정상적인 예금계약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양씨에게 통장과 도장까지 줬기 때문에 그에게 사용할 권한까지 함께 준 것이라는 게 정부 측의 주장이었다. 이처럼 원과 정부 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갈리면서’양씨의 범행을 정상적인 예금계약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가 이 소송의 쟁점이 됐다.

원은 ‘정상적인 예금계약’이었다는 점을 적극 강조했다. ‘예금계약은 예금자가 예금 의사를 표시하면서 금융기관에 돈을 제공하고 금융기관이 그 의사에 따라 돈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면 성립한다’는 1984년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박 변호사는 “이 판례를 보면, 금융기관 직원이 받은 돈을 기관에 입금하지 않고 횡령했더라도 예금계약 성립에는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이 예금이라고 인식한 상태에서 돈을 건넸기 때문에 예금계약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박 변호사는 “대한민국은 별정우체국의 사용자”라며 “별정우체국장은 결국 대한민국의 업무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결국 대한민국은 별정우체국장에 대해 사용자 지위가 있고, 사용자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창환 변호사. /법무법인 원 제공

◇'국가 책임’ 인정한 법원 “예금 반환해야”

1심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33부(부장판사 허준서)는 원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우선 정상적인 예금계약임을 인정했다. 1심 재판부는 “‘우체국예금 등의 지급을 책임진다’ 등의 법리에 비춰볼 때, 피해자들은 국가 산하 우체국예금·보험에 관한 법률상 계좌를 개설한 뒤 예금반환 명목으로 돈을 입금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국가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계좌에 있는 예금을 반환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통장의 상용권한을 넘겨준 것’이라는 정부 측의 주장도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양씨에게 통장과 도장을 준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인출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2심의 판단도 같았다. 서울고법 민사37-3부(부장판사 성언주)는 지난 6월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정상적인 예금계약임을 재차 인정한 2심 재판부는 “양씨가 국장으로 재직하며 피해자들 몰래 체크카드 등을 임의로 만들었고, 퇴직 후에도 예금을 몰래 인출했다”며 “결국 양씨가 퇴직하면서 체크카드를 그대로 가지고 나와 사용한 것이므로 국가에 잘못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서 소송에 참여한 피해자 7명은 10억여원을 돌려받게 됐다.

박 변호사는 “지역 주민들은 별정우체국을 일반 우체국과 동일하게 인식해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다”며 “이 신뢰와 별정우체국의 실제 운영 사이 상당한 괴리가 있는데, 이는 주민들에게 피해로 돌아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별정우체국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감독이 필요하다”며 “현재는 매우 부실한 실정”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