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메모리반도체 업체 삼성전자가 기술이 중국에 통째로 넘어갈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설계자료를 빼돌려 중국에 ‘복제 공장’을 지으려다 12일 검찰에 구속 기소된 전직 삼성전자 임원 등 일당은 반도체 생산을 위한 식각(깎아내는 과정), 세정 등 8대 공정 전체를 ‘복제’하다시피 했고, 온도와 습도마저도 똑같이 베껴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일당이 중국에 세운 공장 연구개발동에서는 삼성전자만의 기술을 훔쳐 만든 시제품까지 나온 상태였다.
검찰은 그간 우리 기업의 핵심 기술 여러 건이 유출된 사례는 있었어도 공장 전체를 ‘복붙(복사+붙여넣기)’한 사례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가 입을 뻔한 피해는 최소 3000억원에서 최대 수조원으로 추산된다.
◇3년 넘는 내사 기간... 피의자 입국 뒤엔 속전속결
12일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수사부(부장검사 박진성)는 산업기술보호법 위반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영업비밀국외누설 등) 혐의로 최모(65)씨를 구속기소했다. 또 최씨가 세운 반도체 회사 소속 A(60)씨 등 5명도 불구속 기소했다. 최씨는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부문 상무, SK하이닉스에서 부사장을 지낸 반도체 전문가이고, 공범 중 3명은 삼성전자 직원이었다.
최씨는 지난 2018~2019년 중국 시안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국가핵심기술이자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인 반도체 공장 BED(Basic Engineerng Data·최적의 반도체를 제조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환경 조건), 공정배치도 등을 부정하게 사용한 혐의를 받는다. 또 반도체 공장 설계도면도 부정으로 취득해 사용한 혐의도 있다.
검찰은 지난 2019년 8월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의 첩보를 입수한 뒤 오랜 기간 내사를 진행했다. 최씨와 주요 공범들이 모두 중국에 있었던 탓이다. 기본적인 조사만 이어오던 검찰은 지난 2월 최씨 등이 입국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최씨에 대한 출국금지를 한 뒤부터 혐의를 확인했고, 넉 달 만에 신병확보에 기소까지 마쳤다.
◇중국·대만 자본과 결탁해 대거 채용... “규모도 최초”
검찰에 따르면 최씨는 2015년 7월 싱가포르에 자신의 회사인 C사를 만들었다. 3년 뒤 대만의 한 회사와 8조원 상당의 투자 약정을 맺었고, 이후 중국 청두(成都)시로부터 4600억원을 투자받아 새로운 회사를 또 세웠다. 이 돈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인력들 200명을 고액연봉과 자녀 복지 등을 제시하며 영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씨가 공장 자체를 ‘복붙’할 수 있었던 데는 삼성전자 출신 직원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협력사 직원에게서 몰래 받은 반도체 공장 BED 자료를 지난 2012년 삼성전자를 퇴사하며 반납하지 않은 채 최씨 회사에 이직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공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최씨는 직원들에게 “삼성전자 반도체 자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수집해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 회사의 공장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과 8대 공정의 배치 순서 등이 같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뿐만이 아니라 BED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져 온도와 습도 등 환경도 똑같았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특히 중국에 만든 D회사의 연구개발(R&D)동에서는 삼성전자 기술로 만들어진 반도체 시제품도 나와 있는 상태였다.
◇세메스 사건보다 혐의 중대... 피해액 산출도 어려워
검찰에 따르면, 단순 기술 유출이 아닌 국내 인력 200명을 해외로 이직시키는 등 조직적인 ‘공장 복붙’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전자만의 기술이 통째로 중국에 넘어갈 뻔했던 것이다.
범죄 규모가 날로 커지면서 법조계에서는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산업기술 전문 변호사는 “기술 유출에 관한 양형 기준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영업비밀 침해 행위의 기본 징역형은 1년~3년 6개월에 불과하다.
기술유출 범죄 중 최근 가장 높은 형이 선고된 사례는 ‘세메스 사건’이다.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 세정 장비의 기술 유출을 주도한 연구원이 올해 2월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공범 6명에겐 징역 2년 6개월이, 가담 정도가 낮은 2명에게는 징역형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산업기술 전문 변호사는 “징역 4년이면 우리나라에선 상당히 무거운 형이 선고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기술유출 범죄를 사실상 ‘반역 행위’ 수준으로 처벌한다. 1996년 제정된 미국 ‘경제스파이법’은 국가 전략기술을 유출하다 걸리면 간첩죄로 가중처벌하도록 규정한다. 또 피해액에 따라 최대 33년 9개월까지 선고할 수 있다. 일본 또한 경제안전보장추진법 등을 적용할 정도로 처벌을 강화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세메스 사건보다 이번 사건에 더 무거운 형이 선고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장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기술을 빼돌린 뒤 그 기술을 이용해 공장을 만들려고 했고, 시제품까지 만들어졌던 사안”이라며 “양산되기 전에 막아서 다행이지, 시중에 풀렸을 경우 단순 기술유출로 발생할 피해액보다 훨씬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