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년 간 우리 증시를 뒤흔든 키워드 중 가장 악명 높은 단어를 꼽자면, ‘불완전 판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불완전 판매란 금융 회사가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위험도와 손실 가능성 등 중요 사항을 알리지 않거나 허위·과장해 잘못 판단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2019년 라임자산운용의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가 터졌을 때 해당 상품을 불완전 판매한 금융 기관이 줄줄이 당국의 철퇴를 맞았으며, 그 여파로 지금까지 법정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유동화증권 투자 손해를 둘러싼 현대차증권과 한화·이베스트투자증권의 소송전도 불완전 판매에서 야기됐다. 지난 달 13일, 서울고등법원은 1심 결과를 뒤집고 한화·이베스트투자증권이 현대차증권에 245억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청구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기관 간 손배소에서 이 정도 배상액이 인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법무법인 린은 항소심부터 참여해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손잡고 법무법인 세종·지평·바른·해광 연합군에 역전승(일부 승소)을 거뒀다.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이홍원(사법연수원 31기)·나윤민(32기)·윤현상(미국 뉴욕) 변호사를 만났다.
◇ 한화·이베스트證 판매한 중국 공기업 어음, 사흘 만에 부도
사건의 발단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화투자증권과 이베스트투자증권은 중국 공기업인 중국국제에너지화공집단(CERCG)의 자회사인 CERCG캐피탈이 모회사의 지급 보증 하에 발행한 외화 사채를 기초 자산으로 1600억원 규모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발행했다.
이 ABCP를 국내 기관 투자자들이 사들였는데, 현대차증권도 그중 하나였다. 총 600억원어치를 사서 100억원어치는 부산은행에 셀다운(재판매)한 뒤 나머지를 본계정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차증권이 ABCP를 매수한 지 단 사흘 만에 CERCG의 다른 자회사가 발행한 회사채가 만기 상환에 실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회사채 역시 CERCG가 보증한 상품이었다. CERCG는 지급유예기간까지도 원금을 상환하지 못했고, 결국 현대차증권이 사들인 ABCP의 기초자산에 대한 지급보증채무 역시 교차부도(크로스디폴트)를 맞게 됐다. 한 곳에서 돈을 갚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채권자의 돈도 못 갚을 가능성이 커졌고, 이에 기한이익상실(EOD)이 발생한 것이다.
현대차증권은 두 증권사를 상대로 부당이득반환 내지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CERCG가 중국 지방 공기업이기 때문에 상환 위험이 없는 것처럼 투자자들을 기망했다며, 50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SAFE 등록·현지 실사…1심 재판부, 두 주장 모두 인정 안 해
이 사건의 쟁점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중국 외환관리국(SAFE)의 보증사실 등록 문제, 다른 하나는 실사 의무와 관련된 문제였다.
2014년 6월부터 시행된 중국의 ‘국경간담보 외환관리규정’에 의하면, 중국 내 회사나 개인이 중국 외의 채무자를 위해 중국 외 채권자에게 차입금 담보를 제공하는 경우, 보증 계약 체결일로부터 15영업일 안에 보증인 소재지 외환관리국에 보증 사실 등록을 신청해야 한다. 등록하지 않으면 보증인은 중국 내 자산으로 중국 외 채권자에게 보증 채무를 이행할 수 없으며 벌금을 부과 받을 수 있다.
CERCG는 보증 당시 회사채의 발행일로부터 90일 안에 SAFE 등록을 완료하겠다고 약정했다. 만약 그러지 못할 경우 회사채 원리금을 조기 상환하겠다는 조항도 있었다. 그러나 SAFE 등록은 90일 안에 완료되지 않았고, 회사채 원리금도 상환되지 않았다.
현대차증권 측은 “보증에 대한 SAFE 등록이 이뤄지지 않으면 자금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음에도, 두 증권사는 이를 투자자에게 고지하지 않고 유동화거래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투자를 권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쟁점은 ‘과연 한화투자증권과 이베스트투자증권에 실사 의무가 있었느냐’였다. 현대차증권 측은 두 증권사가 유동화거래의 공동 주관사이자 ABCP의 인수인으로서 기초 자산의 상환 구조 및 현금흐름, 구조적 문제점과 미상환 위험성 등을 면밀히 조사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아무런 실사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원고의 두 가지 주장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먼저 SAFE 등록 문제의 경우, 한화·이베스트투자증권 측에서 “등록에 특별한 장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법률 의견서를 중국 현지 법률 전문가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재판부는 또 SAFE 등록이 이뤄지지 않아도 CERCG가 충분한 상환 능력을 갖추기만 했다면 ABCP 만기에 어음금을 지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며, “이 사건에서 중요한 건 SAFE 등록 여부가 아닌 CERCG 자체의 상환 능력”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피고들이 실사나 조사 의무를 다하지 않아 투자자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는 원고 측 주장도 인정하지 않았다. 피고들이 직접 CERCG나 자회사에 대한 현지 실사를 하지 않은 것은 맞으나, 회사채의 경우 현지 실사를 하더라도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라고 봤다. 두 증권사는 신용평가사 두 곳을 통해 CERCG의 신용도를 간접적으로 확인했는데, 이를 의무 불이행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조사’로 봐야 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그 외에도 두 증권사가 CERCG의 상환 능력에 문제가 생길 것을 합리적으로 예측하는 게 불가능했다고 1심 재판부는 판시했다.
◇ “뒷돈까지 오갈 정도로 급박했다면, 더 철저히 실사했어야”
1심에서 원고 측은 SAFE 등록 문제에 비중을 실어 주장했으나, 항소심에서 현대차증권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법무법인 린은 두번째 쟁점, 즉 현지 실사 의무 문제에 무게를 두고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실사 의무가 자본시장법에 규정된 개념이 아니었기에, 법리적 다툼이 아닌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다.
린의 변호인단은 이 사건과 관련된 형사 사건에 주목했다. 두 증권사 직원 심모씨와 정모씨가 CERCG캐피탈로부터 뒷돈 52만5000달러를 받은 혐의로 형사 재판을 받았는데, 변호인단은 이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본래 CERCG캐피탈 측은 금리 6.4%로 사모사채를 발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A2 등급의 사채가 이렇게 높은 금리를 제공한다면 투자자들이 의심할 우려가 있었기에, 결국 금리를 5%대로 낮추고 나머지 차익을 심씨와 정씨에게 제공한 것이다.
나윤민 변호사는 “CERCG캐피탈이 뒷돈까지 주면서 다급하게 자금을 확보하려고 했다면, 주관사들은 이 회사가 정말 절박한 상황에 놓였거나 조만간 쓰러질 가능성도 있다는 의심을 먼저 해봤어야 한다”며 “단순히 신평사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좋은 투자처라고 소개할 게 아니라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실사가 필요했음에도, 피고들은 정체 불명의 브로커를 통해 받은 자료를 국내 신평사에 전달한 게 전부”라고 말했다.
윤현상 변호사도 “원래 6% 넘는 금리를 제공하려 했다는 사실은 투자자들에게 전혀 고지되지 않았다”며 “이 사실을 투자자들이 알았다면, 상품의 위험성에 대해 재고해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변호인단은 또 앞서 미래에셋증권이 CERCG의 신용도나 SAFE 등록 리스크를 확인한 후 외화사채 인수를 포기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다른 회사가 이미 중도 포기한 거래를 소개 받았음에도, 한화·이베스트투자증권은 이에 대해 의심하거나 심도 있는 조사를 해보긴 커녕 회사 대표이사 등 책임자들과 대면 전화 통화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증권사가 해외 투자 상품을 국내로 들여오는 ‘문지기’ 역할을 맡고 있었던 만큼 더 막중한 투자자 보호 책임이 있었다는 점도 원고 측이 중점적으로 주장한 부분이었다. 윤 변호사는 “피고들은 코끼리 다리 사진만 찍어와 신평사에 보여주고 평가를 의뢰한 뒤, ‘다리가 튼튼하니 투자하라’고 권고한 셈”이라며 “그러나 알고 보니 코끼리는 병들어 있었고, 결국 쓰러졌다”고 말했다.
◇ 자본시장법 해석보단 사실에서 출발…린 전략 통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고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SAFE 등록 문제에 관한 주장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실사 의무와 관련해서는 현대차증권의 손을 들어줬다. 린 변호인단의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재판부는 “유동화증권의 발행 과정에서 기초자산 등에 관한 위험을 추단할 수 있는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된다면, 주관사에는 더욱 높은 수준의 실사 내지 조사의무가 부과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원고와 피고가 모두 상고한 만큼, 이제 대법원의 판단 만이 남아 있다.
나 변호사는 “우리는 자본시장법의 해석 논의에 뛰어들기보다는 뒷돈이 오고 간 사실에서 출발해 손해배상 책임을 이끌어냈다”며 “상고심에서도 법리적 해석 문제보다는 ‘인수인의 실사 의무가 어떻게 인정될 것이냐’가 쟁점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일반 투자자들이 손해 배상을 청구해도 배상액이 전체 청구액의 30~40%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전문 투자자 간 손해 배상액이 50%까지 인정되는 것은 손에 꼽을 만한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이번 판결의 의의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