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는 2014년 부산지하철 1호선 연장(다대구간) 턴키입찰에서 담합행위가 있었다며 6개 건설사에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6개 건설사가 낙찰 예정 회사와 들러리 회사로 역할을 나눠 담합에 나섰다는 것이다. 부과된 과징금만 122억3900만원에 달했다.
공사를 발주했던 부산교통공사는 공정위 발표 이후 즉각 6개 건설사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담합행위로 인해 156억원에 달하는 손해액이 발생했으니 배상하라는 소송이었다.
재판 결과는 지난 2월 나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한성수 부장판사)는 원고인 부산교통공사의 손해배상 청구를 전부 기각했다. 공정위가 담합 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했는데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선 원고가 완패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법원 “위법한 담합 맞지만 손해발생은 입증 안돼”
재판부도 담합행위가 있었던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고들의 담합행위는 낙찰자, 투찰률 등을 사전에 공동으로 결정하는 행위”라며 “담합이 발생한 1, 2, 4공구 입찰에서는 가격경쟁 자체가 소멸했다”고 지적했다.
담합행위가 인정된 경우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도 원고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 담합행위는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재판부도 담합행위로 인한 손해가 있었다고 합리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담합 관련 판례가 많은 미국에서는 담합이 확정된 상황에서 제기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가 이길 확률이 2~3%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담합을 한 건설사들이 원고인 부산교통공사를 꺾는 반전이 일어났다. 법무법인 태평양을 필두로 한 변호인단의 이른바 ‘감정결과 오류 가능성’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사건을 맡은 태평양 공정거래그룹은 △담합 사실과 △손해발생을 구분해서 접근했다. 담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로인한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부산교통공사는 손해발생을 입증하기 위해 감정평가를 진행했다. 감정인은 조달청이 발주한 일괄입찰공사 42건을 분석해 이 사건 담합행위로 부산교통공사가 156억원에 달하는 손해를 입었다는 감정평가 결과를 내놨다.
하지만 태평양은 이런 감정평가 결과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고 맞섰다. 감정인이 분석한 42건의 자료가 계량경제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신뢰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감정인이 분석한 42건 중 이번 사건과 같은 지하철공사 입찰 자료는 11건에 그쳤다.
재판부는 태평양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분석대상으로 삼은 자료가 충분치 못함에 따라 분석대상 자료 42건 중 1건만을 제외하는 작은 변화에도 손해액 추정결과가 일관되지 않게 변한다”며 “결과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의 충분한 자료에 대한 분석이 이뤄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담합 없었던 3공구 낙찰률이 더 높아
담합으로 손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더 있었다. 담합행위의 증거로 쓰이는 낙찰률이다. 부산지하철 1호선 연장 공사의 경우 4개 공구 중 3공구를 제외한 1, 2, 4공구에서 담합행위가 있었다. 담합이 없었던 3공구의 낙찰률은 96.83%였다. 낙찰률은 예정가격 대비 낙찰가격을 말한다. 담합이 있으면 낙찰률이 높아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담합이 있었던 공구의 낙찰률이 오히려 3공구보다 낮았다. 1공구만 97.85%로 3공구보다 높았고, 2공구는 94.37%, 4공구는 93.97%로 3공구보다 낮았다. 윤성운 태평양 변호사는 “담합 공구와 비담합 공구 사이에 낙찰률 차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건 담합으로 인해 실제 경쟁이 있었더라면 형성됐을 수준보다 더 높게 낙찰가격이 형성됐다고 단정할 수 없는 사정”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 역시 태평양의 주장에 동의했다. 재판부는 “감정인이 제시한 분석 모형은 지하철공사와 일반 토목건설공사의 구조적 차이 및 지하철공사라는 과점 또는 독점적 경쟁시장에서의 가격형성 요인 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를 근거로 한 손해액과 손해발생 여부에 대한 판단 또한 신뢰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계량경제학자 영입한 태평양… ‘수(數)싸움’도 이겼다
이번 사건 판결문에는 경제학이나 수학 전공자가 아니면 읽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경제학 용어와 수식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 법리 만큼이나 손해발생 여부와 손해액 산정을 놓고 원고와 피고 측이 경제학적 분석을 놓고 치열하게 다퉜기 때문이다. 결국 태평양이 이끈 피고측 변호인단이 이 싸움에서 완승을 거뒀다.
태평양 공정거래그룹장인 윤성운 변호사(연수원 28기)는 담합행위 관련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수십 건 대리해오면서 쌓인 노하우가 승소의 비결이라고 밝혔다. 태평양은 담합행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군납유담합 손해배상 소송’을 비롯해 굵직한 담합 관련 손해배상 소송을 여럿 대리했다.
특히 윤 변호사는 경제학자들과의 긴밀한 협업이 주효했다고 밝혔다. 그는 “경제학자들과 협업해서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법원에 감정평가에 대한 반박보고서를 제출하고 전문적인 내용을 잘 풀어서 재판관에게 전달하는 것이 모두 공정거래사건에서 변호사가 해야 할 역할”이라며 “담합 관련 손해배상 소송 외에 기업결합 소송 등 공정거래 사건에서 계량경제학이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태평양은 올해초 경제학 분석을 위한 ‘법경제학센터’를 출범하기도 했다. 경제분석 전문가인 신동준·김득원 박사를 영입해 변호사와 경제학자의 협업을 강화하는 취지다.